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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실탄 받고 박격포까지 동원 국군통합병원 투입”
[5·18 계엄군의 고백] <3> 20사단 사병 첫 증언 정 모씨
24일 광주교도소 지원…3공수여단 시신 암매장 얘기 들어
“모교 광주고 확보작전 투입 ‘운명의 장난’ 같았다”

2018. 05.17. 00:00:00

마르지 않는 눈물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이틀 앞둔 16일 구선악(여·77)씨가 아들 이정연 열사의 묘역에서 오열하고 있다. 이 열사는 80년 5월27일 시민군의 최후 항전지인 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에게 희생됐다. /최현배기자 choi@

“80년 5월22일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서 점심을 먹고 국군통합병원 점령작전에 투입됐다. 나는 실탄 20발씩 들어있는 탄창 2개를 보급 받았지만 5개까지 받은 부대원도 있었다. 우리보다 앞선 부대원들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들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된 20사단 62연대 2대대 소속 일병이었던 정모(59)씨에게 여전히 5·18은 떠올리기 힘든 기억이다. 수년 전 술김에 지인에게 딱 한번 털어놓았을 때 ‘나쁜XX’라는 소리부터 들은 뒤론 혼자만의 아픔으로 간직하고 있다.
지난 12일 전북 익산시에서 만난 정씨는 ‘아는 게 없으니 할 이야기도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그동안 공수부대원이나 장교들의 증언은 일부 있었지만, 광주항쟁에 투입됐던 20사단 사병의 언론 인터뷰는 정씨가 처음이다. 정씨는 “광주진압작전의 대부분은 공수부대가 주도했고 20사단은 지원 임무만 했다”고 주장했다. 일부 20사단 출신 장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인터넷 등에서 북한군 개입설을 꾸준히 유포하고 있지만 정씨의 의견은 달랐다.
전북 김제시 출신으로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한 정씨는 “5·18 당시 부대원 사이에서 광주시위는 북한 고정간첩이 주도했다는 소리가 돌았지만 광주에서 학교를 나온 나는 믿지 않았고 간첩으로 의심될 만한 사람들을 본 적도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80년 5월 17일 계엄확대조치와 함께 경기도 양평군에 주둔하고 있던 20사단은 서울 시내 10여개 대학에 부대를 진주시켰다. 정씨의 대대는 서울시립산업대(현 서울시립대)에 투입된다. 20일 오후 고교 5년 선배였던 소대장이 김씨에게 “하마터면 광주로 갈뻔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왜 소대장이 광주에 대해 심각하게 이야기하는지, 대학에서 본 ‘전두환 물러가라’ 피켓 속 전두환이 누군지 몰랐다.
그날 밤 정씨는 다른 부대원들과 청량리역에서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광주 송정리역으로 출발했다. 단순히 광주에서 시위 진압을 하는 줄 알았던 정씨는 이튿날 아침까지 한번도 쉬지 않고 달린 기차가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다.
정씨가 소속된 62연대는 전교사에 주둔하며 광주∼목포간 도로 봉쇄작전에 투입되던 중 22일 오후 화정동 국군통합병원을 확보하기 위해 이동했다. 전교사에서 실탄 40발을 수령한 정씨는 왜 실탄까지 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중대 박격포병은 81㎜ 박격포를 어깨에 매고 갔다. 포탄은 지급되지 않았다.
정씨는 “통합병원까지 걸어서 이동했는데 주민들이 ‘전방을 지켜야할 군인들이 왜 광주에 왔느냐’고 물어 ‘우리부대는 나를 포함해 광주 출신들이 많이 있으니 걱정말라’고 대답했다”며 “통합병원에 도착할 때 쯤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정씨가 속한 8중대는 그나마 뒤처져 있어 총격이 덜했지만 앞선 6중대는 치열하게 교전했다. 정씨 바로 옆 벽에도 총알이 날아와 박혔다. 20사단 충정작전 보고에 따르면 당시 작전은 ‘군 부대 요원 및 민간 부상자 치료’ 목적을 위해 작전을 전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20사단은 22일 오후 5시부터 장갑차 3대를 선두로 내세워 작전을 전개했으며, 작전 과정에서 통합병원 인근에 거주하는 이매실(여·당시 68세)를 비롯해 민간인 8명이 총상으로 사망했다.
통합병원에 도착한 62연대는 경계 임무를 수행하다 24일께 광주교도소 방비 지원에 나선다. 정씨의 부대는 교도소 뒤편 야산에 A형 텐트를 치고 경계를 섰다.
정씨는 “당시 시민군들이 교도소에서 정치범들을 빼낼 수 있다는 설이 돌았다”며 “나중에 교도소 습격설도 나왔는 데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 부대는 아니지만 3공수여단이 교도소 뒤쪽 땅에 시신을 묻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며 “불쌍한 피해자 유족들을 위해 하루 빨리 행방불명자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정씨는 시민군 최후 항전지인 도청 진압작전이 전개된 27일 오전 모교인 광주고등학교 확보 작전에 투입됐다. 그는 이를 ‘운명의 장난’이었다고 표현했다. 동신대 뒷산∼교육대 뒷산∼계림초를 지나 졸업 후 4년 만에 총을 든 군인 신분으로 모교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정씨는 “광주고 출신이니 나보고 앞장서라고 했다”며 “그냥 담을 넘으면 총격을 받을 것 같아서 철책 담 밑을 파고 들어갔다. 그런 식으로 다시 모교를 방문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미리 진입했던 다른 부대원들이 오인 사격을 해 사상자가 나올 뻔한 아찔한 상황을 겪기도 했지만 시민군은 없었다. 공수부대와 달리 민무늬 전투복을 입은 20사단 장병에게 지역 주민들은 주먹밥 등을 가져다 줬다. 매일 군용식량만 먹었던 정씨는 “아직도 그 맛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정씨는 “7공수여단이 일은 다 벌려놓고 뒷수습하러 들어간 우리는 아직까지 5·18 가해자로 손가락질 받고 있다”며 “박준병 20사단장은 별 4개를 달고 국회의원까지 했지만 나는 트라우마를 겪으며 가정이 파탄나 환갑이 다 된 나이에 혼자 살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5·18을 정치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정말 꼴보기 싫다”며 “잔혹하게 시민을 학살한 5·18 장본인들이 모두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정의가 있는 세상인가 자문하게 된다”고 말했다.
/전북 익산=김용희기자 kimy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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