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계(漆溪) 김언거(1503∼1584)는 김정(金禎)의 셋째 아들로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자(字)는 계진(季珍), 본관은 광산이다. 1525년(중종 20) 사마시(司馬試), 1531년 문과병과에 급제한 뒤 옥당(玉堂:홍문관)에 뽑혀 교리·응교·봉상시정(奉常寺正) 등의 내직(內職)을 거쳐 상주(尙州)·연안(延安) 등의 군수를 지냈다. 승문원 판교(判校)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저서로는 죽와휘어(竹窩暉語), 송사절요(宋史節要), 역대명신간소초(歷代名臣諫蔬抄), 가례초(家禮抄) 등이 있다. 풍영정 앞을 흐르는 극락강은 칠천(漆川)이라 불렸는데, 자신의 호를 여기에서 따온 것으로 볼 때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강호자연을 애호하는 높은 풍류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광주 신창동 극락강변의 선창산 위에 자리한 풍영정(風詠亭)은 근동에서 으뜸의 풍광을 가진 곳으로, 칠계 선생이 명종 15년(1560년) 내직과 외직의 오랜 관료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에 지었다. 이곳에서 그는 82세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10여년 동안 송순, 이황, 김인후, 기대승, 고경명 등 이름난 문인들과 교우하며 지냈다. 풍영정에 남아 있는 이들의 제영현판(題詠懸板)은 이때의 흔적이다.

또한, 여기에는 ‘제일호산’( 第一湖山)이라는 편액도 걸려 있는데, 이는 명필 한석봉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풍영정 원운(原韻)은 병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이 이곳을 지나면서 지은 것으로, 그의 6대손 광주목사 조진민(趙鎭敏)이 새겨 걸었다. 1948년 후손들이 지붕을 수리하였는데, 당시의 기록이 풍영정수리후추모서실(風詠亭修理後追慕敍實) 현판으로 남아 있다.

선생은 학문과 덕망이 높아 낙향을 하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12채나 되는 정자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풍영정을 제외한 나머지 정자들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말았다. 풍영정만 소실을 면한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다른 정자들이 다 타버리고 풍영정이 불길에 휩싸이자 현판 글자 가운데 앞의 ‘風’자가 오리로 변해 극락강 위로 날아올랐다. 기이하게 느낀 왜장이 즉시 불을 끄도록 하자 극락강의 오리가 현판에 날아들어 다시 글씨가 또렷이 되살아났다.

현재 정각에 걸린 현판의 글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風’(풍)자와 ‘詠亭’(영정)의 글씨체가 약간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차이로 인해 전설이 생겨난 까닭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시냇물과 산자락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진 곳이라 하여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편액이 걸릴 정도로 한 동안 광주지역에서 이곳의 풍치를 압도할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단정되었던 곳이 풍영정이었다.

옛날에는 풍영정 앞 극락강이 수량이 풍부하여 영산강의 수로로 이용되었으며 풍영정을 둘러싼 수많은 사연의 일화들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빼어난 정자도 장구한 시대의 변천과 주변환경의 변화추세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일까?

이제는 풍영정의 바로 밑자락까지 집단주거시설인 아파트단지들이 밀집해 채워지고 말았다. 인위를 배제하고 자연의 순응주의를 표방한 선인들의 풍류문화와 안락함을 추구하는 주거생활문화의 공존을 시대적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한없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