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걸어요 통일의 길 제1부-희망 찾기] ‘10년 근속’ 김철호 럭키금속 과장
2017년 01월 09일(월) 00:00
“탈북보다 힘든 한국 생활 … 끈기와 열정으로 이겨냈죠”
김철호(57)씨는 광주 평동산단 내 가스레인지 제조업체인 ‘럭키금속(주)’ 과장이다. 이 회사에서 근무한지 햇수로 벌써 10년째다. 이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도 한 회사에서 10년 버티기 힘겨운데 하물며 북한이탈주민인 김씨는 어떠했을까? 이에 대해 김씨는 “특별히 뭘 잘한다기 보다는 열정과 끈질김이 10년을 버틴 힘이었다”며 “인내심을 가지고 오래 근무해야 친구·가족이 되고, 그래야 온전한 사회구성원이 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2008년 신변보호 담당형사의 소개로 이 회사에 입사했다. 담당형사와 회사 대표는 친한 사이였다. 그것 때문에 회사 직원들은 낙하산으로 오해해 대놓고 그를 싫어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사장 자녀들이 북한사람 머리에 뿔이 났는지 확인하겠다며 회사로 찾아온 것이다. 순간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지만 정착하려면 참아야 했고, 아이들에게 웃으면서 “북한 사람도 사람이기에 머리에 뿔이 없다”고 말해줬단다.

그는 주변에서 색안경을 끼고 대할 때마다 다짐했다.‘잘하자, 흠 잡히지 말자’라고. 그렇게 성실함을 보여줬고, 회사동료들은 그런 그를 인정해 가족으로 받아줬다. 지금 주위를 살펴봐도 김씨처럼 꾸준하게 10년을 다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한반도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군 두만강변에서 태어난 김씨는 특수부대 군관이었다고 했다. 1976년 ‘8·28 도끼 만행 사건’이 발생하자 고등중학교 5학년(고교 2년)이었던 그도 징집됐다. 군생활이 체질에 맞았던지 군의 추천을 받아 북한 최고 군관학교인 강건종합군관학교를 거쳐 군관이 됐다. 그렇게 13년을 군에서 보냈다. 17살에 입대했다가 30살이 되어서야 제대한 것이다.

군관이었던 탓에 김씨는 제대 후 고향에서 큰 건설회사의 작업반장으로 배치됐다. 생활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김일성 사망 이후 식량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배급이 밀리다가 배급량이 줄었고, 급기야 끊겼다.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청진 같은 대도시에서는 하루에 몇 백명씩 죽어나갔어요. 대부분 도시노동자들이었죠. 시골은 농사라도 지을 수 있어 굶어죽지는 않았거든요.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 장례를 지낼 수 없어 그냥 산에 버렸죠. 이웃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게 됐고, 감시체계도 마비상태에 빠지면서 중국으로의 탈출이 이어졌어요.”

그는 1999년 6월, 중국에 있는 친척의 도움을 받고자 두만강을 건넜다. 식량을 구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났지만 중국행은 그를 불법체류자로 만들었고, 삶은 고달펐다. 시골에서 소와 양을 기르며 공안을 피해 4년을 숨어지냈다. 탈북자라는 사실이 안 중국인들은 급료를 떼먹기 일쑤였다. 항의하면 신고하겠다는 협박만 돌아왔다.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공안에 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정신적인 고통이 더 심했다.

탈북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그는 죽을 고비를 2번 넘겼다. 2번 다 중국 공안에 붙잡히기 일보직전에 가까스로 탈출했다.

어느 날 연길 시내에 갔다가 시골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는데 공안이 신분증 검열을 했다. ‘걸렸구나’라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다가오던 공안이 갑자기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 밖에서 술을 마신 사람들이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났고, 그들을 제압하려고 신분증 검열을 하다말고 버스에서 내린 것이다. 식은땀이 온 몸을 적셨다.

그는 한국에 오려고 탈북한 게 아니었다. 중국서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돈을 벌기는 커녕 공안에 쫓겨 숨어지내야 했고, 4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4년의 시간은 그를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결심했다. 초조·불안·공포에 떠느니 한국으로 가자고.

그는 탈북루트로 동남아가 아닌 몽골을 택했다. 동남아는 안전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탓이었다. 빠르면 3개월, 늦으면 10년도 걸린다. 그래서 위험하지만 몽골로 정했다. 몽골루트는 하얼빈을 지나 사막지대를 거쳐 몽골로 들어가는 코스다.

탈북은 위험하다. 밤에만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막은 더 위험하다. 사막에서는 구름이 끼면 방향을 가늠할 수 없다. 그도 탈북 강행 첫날 사막에서 길을 잃어 다섯번이나 제자리를 맴돌았다고 했다. 브로커는 일정거리까지만 데려다주고 가버렸다. 브로커가 떠나면서 “40분만 더 가면 된다”고 했는데 4시간을 걸어도 국경은 나오지 않았단다. 날은 밝아왔다. 저 멀리 중국공안의 짚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큰일 났다. 붙잡히면 북송되는데…” 조바심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드디어 국경 철조망이 나타났다. 함께 탈북한 이들을 모두 넘겨주고 간신히 그도 넘었다. 철조망을 넘자마자 몽골군이 나타났다. 구세주였다. 자신들을 뒤쫓던 중국공안은 헛물만 켠채 발걸음을 돌렸다. 사막의 천막에서 일주일간 대기하다가 몽골의 수도 울란바트로로 이동했고, 2003년 7월7일 드디어 인천공항으로 들어왔다. 북한을 떠난 지 꼭 4년 만이었다.

한국에서의 삶은 순탄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남한 정착 역시 어려웠다. 북한 말투와 억양, 남한에서 자주 쓰는 외래어는 적응하기 어려운 관문이었다. 그는 “오랜 연습 끝에 억양과 말투를 고쳤지만 아직도 외래어는 어렵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종종 현금인출기를 사용할 줄 몰라 길 가던 아가씨를 불러세워 도움을 받았던 기억, 버스노선을 몰라 반대 방향의 버스를 타고 ‘왔다 갔다’를 반복했던 일 등 초기 정착할 때의 모습을 떠올린다.

김씨는 광주북한섬김학교(NK비전센터)에서 간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정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 자신도 새식구를 돕고자해서다.

NK비전센터는 탈북민을 중국에서 구출해오고, 탈북민의 지역사회 정착을 돕는 선교단체다. 매주 토요일 ‘밥상공동체’를 운영하는데 어르신들을 모셔오고 모셔가는 일은 그의 몫이다. 어르신들은 그를 아들처럼 생각한다. 밥상공동체는 한 밥상에서 밥을 먹으며 작은 통일을 이루어간다는 의미가 담겼다.

그는 어려서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못했다. 그는 “탈북어르신들을 만나면서 고향의 친부모에게 못해드린 효도를 하고 싶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박정욱기자 jw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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