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답지 않게 푸근하다 싶더니 지난주부터는 폭설과 추위가 맹위를 떨치며 전국에 한파가 며칠째 이어졌다 햇볕이 드리우는 날을 기다렸다가 가족과 함께 ‘눈의 여행’을 시작했다

경기도 가평 작은 아버지 집이 여행의 목적지다. 작은 아버지는 서울에 살면서 운수업에 종사하다가 15여년 전에 퇴직하고 이곳에 전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오래 전부터 소박하면서도 멋진 풍경과 함께 자연 속에서 노후를 보내길 바라던 작은 아버지. 좋은 풍경을 즐기고 관조할 줄 아는 분이 그간 내렸던 눈으로 온통 눈꽃 세상으로 변한 아름다운 모습에 내가 생각났단다. 고기와 고구마도 구워먹자 하고 멋진 설경도 담아가라시며 초대의 전화가 왔었다.

나는 지난 연말까지 정신없이 바쁘게 창작활동을 했기에 가정에는 소홀했었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조금은 여유를 갖을 수 있었다. 어린 딸에게 특별한 계절이 만들어 준 눈세상을 추억으로 선물할 수 있는 기회. 그동안 자주 할 수 없었던 가족여행을 만회하면서 또 하나의 추억과 웃음꽃, 그리고 멋진 설경을 카메라에 담을거라는 행복한 상상. 그렇게 작은아버지 초대는 일석삼조의 여행 결정 배경이다

작은 아버지의 집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 청평호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광주에서 출발해 도착하기까지 보통 4시간 정도 소요된다. 하지만 여유롭게 쉬엄쉬엄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들러 군것질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서울을 지나고 목적지에 가까워지면서는 국도, 지방도로를 가다 서다 좋은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그렇게 무려 8시간 걸려 도착했다. 반갑게 마중나오신 작은 아버지는 2년 새 흰머리도 부쩍 많아졌고 시골 사람이 다돼 보였다

딸 유림이의 웃음소리와 모처럼 찾아온 아침햇살이 어우러진 상쾌한 하루가 시작됐다. 땅거미 내려 앉을 즈음에 도착해 잘 몰랐지만 정말 눈꽃, 설국이 따로 없는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눈산 깊숙한 곳으로는 온세상 하얀 깨끗함과 하늘은 유독 푸르렀다. 도심에서는 느끼기 힘든 겨울 풍광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2주쯤 지나면 입춘이었다. 겨울 한가운데 있는 산은 느릿느릿 봄을 향해 걸어가는 것 같다.

뽀드득 뽀드득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밭에 유림이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이내 두 시간 정도 지나니 가족 모두가 함께한 주변은 온통 즐거운 흔적으로 채워졌다.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고…. 한쪽 비탈진 곳에 큰 대야를 들고 온 할아버지. 썰매 시범을 보이는 순간 손주는 할아버지에게 최고의 미소로 답해준다. 그 어떤 놀이시설 부럽지 않는 즐거운 시간이다.

장갑을 끼고 놀았지만 손은 땡땡 얼었고 귀여운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안쓰런 마음에 손과 얼굴을 감싸며 호호 사랑을 불었다. 그 와중에도 아빠 귓전에 광주 할머니에게 맡겨둔 강아지 ‘짱아’가 생각난단다. 유림이의 머리 속은 온통 이 눈밭에서 짱아와 같이 뛰노는 생각 뿐이다.

오후에는 청평호 수변을 둘러보았다. 호수는 고요하고 둔치의 느티나무는 강건했다. 진정 차분해지는, 그리고 수려한 경관이 너무 아름답다. 청평호 하류이면서 도로가 없어서일까, 인적이 드물다. 눈앞에 펼쳐진 이국적인 모습의 설경. 그 누구도 갖지 않는 풍경을 담는다는 욕심에 연신 셔터를 눌렀다. 다른 계절엔 물과 식물, 꽃이 풍성했겠지만 지금은 차가운 바람이 감도는 호수는 하얀 눈이 많이 내려 음소거 버튼을 누른 듯 조용했다. 내 카메라 셔터 소리는 호수의 적막함을 조금씩 지웠다.

그 순간 가엷은 소멸의 풍경은 또다른 침묵의 풍경, 텅빈 충만함으로 가득했다.

호수의 상류는 좀 전과 많이 달랐다. 꽤 많은 여행자들과 차량들 그리고 펜션과 현수막이 이곳 저곳 눈에 띄었다. 유독 사람이 많이 붐볐던 한 식당에서 황태해장국을 가족 모두 맛있게 먹었던 일도 기억난다. 사계절 풍광이 좋아 가평이나 양평에는 많은 작가들이 터를 잡고 작업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간 알게된 작가 몇 분도 가평에 화실를 갖고 있다. 서울∼가평을 오가며 사계절마다 각기 다른 근사한 풍광을 즐기면서 생활한다고 생각하니 부럽기 그지없다.

청평호 주변을 좀더 드라이브 하면서도 여전히 차창 밖으로 멋진 설경이 펼쳐져 있었다.

다음날 아내가 평소 가보고 싶어한 남이섬을 방문할 계획이었지만 취소했다. 어제 신나게 놀았지만 무리해서인지 유림이가 열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매서워진 차가운 바람, 심상치 않는 날씨는 여행의 끝을 조금 앞당겼다.

북한강 상류로 30㎞ 정도만 올라가면 도착하는 남이섬을 가보지 못하고 집으로 향하는 아쉬움이 진했다. 나중에 다시 찾기로 하고 아름다운 수변 경관과 산세 수려한 작은아버지 집에서의 인상은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오광섭

-전남대 예술대학 졸업

-개인전 4회, 2015 한국구상대제전, 한국현대미술 신기회전 등 단체전 200회.

-한국미술협회,신형회,KAMA,한국현대인물화가회,신기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