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하나의 도시를 떠날 때면 그곳을 떠난다는 아쉬움보다는 새로 다가올 목적지에 대한 설렘이 더 컸다. 누구나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을 것이다.

변화하는 창밖 풍경을 통해 어느새 목적지에 가까워짐을 느꼈다. 산타루치아 역에 도착함을 알리는 차내 방송이 흘러나올 때 쯤 내가 타고 있는 기차는 도심 구시가지로 진입하는 긴 다리를 달리고 있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타임머신에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도착한 물의 도시 베네치아. 한때 지중해 권역에 세력을 떨쳤던 해상공화국 요지였고 오늘날에는 독특한 운하 예술건축들로 낭만적이면서 화려한 분위기를 풍기는 도시다. 이곳은 왠지 가슴 설레고 ‘여행’이란 단어가 와 닿았다.

무작정 거닐다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 나오는 꽃’이라는 의미의 카페 ‘플로리안’을 찾았다.

현존한 가장 오래된 카페 중 하나이자 괴테, 루소, 쇼팽, 모네 등 수많은 명사들이 즐겨찾던 곳이라는 이유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고풍스런 인테리어와 많은 그림들이 걸려있고 맛있는 빵,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다. 꽤 비싼 가격이지만 차 한잔을 시켜놓고 옛 예술가를 생각했다. 나보다 200년은 먼저 이곳을 여행한 괴테의 여행글을 읊으며 과거의 시간을 되짚어 본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귀중한 것뿐이다. 그것은 결합된 인간의 힘이 만들어낸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작품이며 한사람의 군주만이 아니라 한민족이 함께 건설한 훌륭한 기념비인 것이다. 그래서 설혹 그들의 갯벌이 점차 메워져 사악한 기운이 늪 위를 감돌고 그들의 상업정신이 위축되거나 그들의 권세가 땅에 떨어지는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이 공화국의 위대한 기초와 본질은 한 순간이라도 그것을 관찰하는 사람의 외경심을 손상시키지 않을 것이다.”

수세기 동안 사회정치 중심지였던 산마르코 광장은 나폴레옹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칭하며 아끼던 곳이다. 내가 본 광장은 옛 건물들이 사무실, 골동품가게, 호텔 등 상업적인 공간으로 변모하며 예전 명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인파와 비둘기 때문에 얼른 발길을 돌리고 싶었다.

곤돌라, 바포레토(수상버스)가 분주히 오가는 운하의 여유로운 모습은 아름다운 수상 건물과 조화를 이루어 운치를 더했다.

그동안 사진으로만 보던 대운하 어귀에 위치한 바로크 양식의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을 찾았다. 전체적으로 밝은 빛인 대리석 조각작품은 화려했지만 과한 듯 과하지 않아 그 모양새가 기품이 있었다. 천장에는 티치아노의 ‘카인과 아벨’, ‘아브라함과 이삭의 희생’ 등 많은 작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성당은 잘 꾸민 젊은 여인과 같은 화려함과 생동감 있는 장식으로 어찌 그리 우아하고 아름다운지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건물은 1630년 시민 3분의 1이 역병으로 죽자 이를 추모하기 위해 지어졌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를 표현한 조각품은 악을 물리치는 희망과 온화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는데 정교함과 살아있는 듯한 표현이 가히 감탄을 자아낼 만하다.

삶이 느껴지는 좁은 골목을 찾아다녔는데 이곳에서는 지도가 별 의미 없었다. 숨어있는 골목길은 섬세한 미와 문화가 느껴지는 또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이며 박물관이었다.

멀쩡한 길이 갑자기 없어지거나 운하가 앞을 가로막는 일이 허다했다. 골목 골목으로 통하는 조그마한 통로는 현재가 아닌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곤돌라에서 부르는 사공의 노래를 들으며 미로 같은 골목길의 새로운 풍경에 다리 아픈 줄 모르고 정처없이 걸어다녔다. 햇빛 좋은 낡은 건물 창가에 앉은 고양이 한 마리가 꽃향기에 취한 듯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평화롭고 정겨워 스케치 해본다.

사람들이 시끌시끌 사는 모습을 보며 무언가 빠뜨린 것 같아 자꾸만 뒤돌아보는데 그건 아마 삶이 묻어나는 어느 골목 하나라도 놓치기 싫은 아쉬움 때문이겠지.

마치 동화에나 나올법한 알록달록한 집들이 즐비한 부라노섬. 과거 안개가 많아 집을 쉽게 찾기 위해 집집마다 각기 다른 색을 칠하게 됐는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파스텔 톤 집들의 아름다운 조화와 이러한 발상이 놀랍고 재미있다.

이곳 저곳 구경하며 길을 따라 걷고 또 걷다보면 출발장소로 다시 되돌아가기도 하고 방향을 잃는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한다.

그래! 여행은 이리 헤매야 제맛이지. 오랜만에 찾은 마음의 여유를 통해 스스로에게 많이 관대해졌음을 느꼈다.

내가 여행하는 이유는 아주 작은 일 하나라도 모험으로 즐길 수 있고 세상을 만나는 일이 결국 나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스스로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설정해 놓은 울타리 속에서 가짜연기를 하고 있는지 가끔 고민해야 한다.

자기 삶을 찾으려 노력하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볼 기회를 갖는 곳은 집도, 일터도 아닌 제 3의 공간인 여행 장소다.

많은 사색을 하게 되는 여행은 우리 삶에 성찰을 가져다주는 시간이다. 여행이 삶의 위로가 되고 나아가는 과정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문명호

-조선대 미술대학 졸업

-개인전 9회, 국내외 그룹초대전 400여회

-SOAF, KIAF, 부산, 울산, 광주아트페어 참여

-대한민국미술대전 등 각 공모전 심사위원 역임

-전남도전 및 무등미술대전 초대작가, 한국미협·한국전업미술가협회·예술사회·광주사생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