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신명이여! 우리의 소원을 귀담아 들어주소서!”

물! 푸른 물! 고요하며 잔잔하게 청명한 하늘색도 받아들이고 달도 안아주며 구름이 흘러가면 비춰 주기도 한다. 그래서 노자는 물을 빌려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의역하면 ‘지극한 도(道)는 마치 흐르는 물과 같다’는 뜻으로 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그런데 아침 햇살에 반영된 백두산 천지의 수면은 신비스럽기도 하지만 불사약을 훔쳐 달 속으로 달아났던 미인이라는 월궁항아(月宮姮娥)처럼 아름답다.

아! 백두산 천지. 우리는 백두산을 영산(靈山)이라 부른다. 백두대간의 시원이자 잃어버린 왕국의 만주 벌판을 굽어보는 장대(將臺)와 같은 곳이다.

17년 전, 천지를 보았을 때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운무에 싸인 천지의 풍광의 신비감은 넓고 크게 다가왔다. 아마도 계절이 주는 시절 인연도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딱딱한 철 구조물의 보호망도 없었고 비록 중국령에서 올라본 것이지만 흙냄새가 그윽한 원시성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또 주위의 봉우리들을 올라볼 수 있어 다양한 곳에서 천지를 바라 볼 수 있어 더욱 좋았다.

그러나 금년 11월 초, 눈이 쌓인 백두산을 대면하다 보니 쾌청한 하늘과 흰 눈이 자연의 조화를 이룬 듯하지만 감동이 덜한 느낌이다. 또 한편으론 백두산에 오르기 전 일정이 1500년 전의 빼앗긴 고구려 성터 유적답사였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다큐사진작가 박하선 선생님과 일행 3명이 17일간 동행해 주민들에게 탐문해서 산 넘고 끝없는 들판을 지나 역사의 흔적을 찾는데 그 과정이 꼭 해병대의 특수훈련을 받는 기분이었다.

심양(瀋陽)에서 북진(北鎭) 의무려산(醫巫閭山)의 고구려 성터와 개주(盖州)의 대석교(大石橋)에 있는 건안성(建安城), 수암(岫岩) 양가보향(楊家堡鄕)의 고구려 고성(古城)을 이틀간 답사하고 봉황산(鳳凰山) 오골성의 북문과 남문, 정상부근의 장성(長城)을 탐방했다. 그 뒤 백두산에 올라 기차로 14시간 이동한 후 심양에 다시 입성한다. 기반산(棋盤山)의 고구려 성터가 있는 석대자산성(石台子山城)에 이어 서풍(西豊)의 부여성(夫餘城)인 성자산산성(誠子山山城)에 오른다. 여덟 곳의 이끼 낀 성터는 선조들의 우렁찬 함성소리를 듣는 듯하다. 허망한 흥망성쇠의 현장을 답사하니 답답하기도 하지만 자긍심과 함께 감회가 깊어진다. 역사의 발자취를 밟은 느낌은 ‘우리의 역사를 모르면 민족혼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선조들의 웅혼한 기상과 진취적 역동성을 상기하다 보니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견주어진다. 우매한 위정자들이 강대국의 눈치 보며 국민의 고혈을 짜내 혈세를 상납하지는 않은지 의구심도 생겨나고 특히 사대주의 근성이나 친일적 역사관으로 오로지 개인의 이익에 눈이 멀어 역사의식과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있지 않은지 자성해 볼일이다.

오래만에 다시 보는 백두산이지만 멀리 보이는 북녘 땅에서 여유 있게 오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통일이 됐다면 백두산을 보는 감동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 일행은 동트기 전 살포시 흰 눈이 쌓인 이도백하(二道白河) 숙소에서 출발하여 오전 8시쯤, 도로가에 도열한 자작나무숲을 지나 대형 매표소에 이른다. 많은 인파가 방한복을 임대하여 입장을 기다린다. 꽤 비싼 입장권을 사서 2번을 환승하고 철저한 통제에 따라 입산해 백설기 떡 같은 흰 눈을 보며 몇 걸음 걸어 백두산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둔덕에 선다.

일요일이라 중국관광객으로 인산인해다. 한국관광객은 우리 일행을 합쳐 두 팀이다. 체감온도는 그렇게 춥지는 않았지만 찬바람에 붓끝이 얼어버린다. 준비한 화구를 펼치고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말소리가 들린다. “아무렇게나 쓱쓱 문지르니 그림이 되네?” 라고 하는 말이 참으로 정겹게 다가온다.

중국인들은 자국의 영토라 생각하고 쾌활한 분위기이지만 나는 왠지 유쾌하지 않았다. 한반도도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고 백두산도 절반으로 국경이 정해져 있으니 더욱 그렇다. 동북공정이라는 중국과의 역사문제는 차치(且置)하더라도 먼저 남북통일이 되면 모든 것이 풀릴 것이며 남북의 정상들이 화합해 지혜로운 배짱으로 도전하면 아주 쉬운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70년 전, 일본식민지에서 해방되고 6·25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초대 대통령에 의해 시작된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은 현재까지도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자 자주권이 없는 목이 길어 슬픈 사슴과 같다. 분단의 족쇄와 아픔은 주변 강대국에도 있지만 우리의 내부에 고질적 난치병인 식민지사관의 기득권층과 어용학자들 때문이 아닌가 반성해본다. 또한 통일을 원하지 않은 상류층과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니 유감이다.

오래전 미국의 한 고위층이 ‘한국 사람들은 들쥐와 같다’고 했던 발언이 생각난다. 그런 치욕의 말에 대처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 내면의 거울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 남한은 이미 서구의 편서풍(偏西風) 문화에 동화되어 통일 감각이 무뎌지지 않나 살펴봐야한다.

또 북한이 고향인 어느 노인은 김대중 정부 시절에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은 절대 망해서는 안되지만 망해야 할 나라”라고. 당시 대북 지원 사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한 단면이다. 민주주의체제이니 다양한 의견은 존중하지만 일체감으로 단합해야한다. 멀리 내다보는 안목으로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서는 안 된다.

첩첩산중이지만 그래도 한반도의 미래가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독일처럼 남북의 화합과 화해를 통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우리가 풍요롭게 사는 길은 조국이 하나가 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묘향산도 백두산도 우리 땅으로 밟아 올라가야 한다.

이러저러한 상념들이 환상적인 기적을 바랄 수 없지만 그래도 백두산 화산석 제단에 준비해 간 술과 과일과 떡을 진설(陳設)해서 ‘조국에 사랑과 평화를’ 기원하며 기도한다.

“천지신명이여! 토지를 맡은 팽우(彭虞)와 글을 맡은 신지(神誌)와 농사를 맡은 고시(高矢), 세 선관과 풍백(風伯 바람을 관장하는 신령), 우사(雨師 비를 관장하는 신령). 뇌공(雷公 우뢰를 관장하는 신령), 운사(雲師 구름을 관장하는 신령)의 신령들이여! 구국제민(救國濟民)을 위해 우리의 소원을 귀담아 들어주소서!” 라고.

그리고 일행들은 음복(飮福)을 해야 복 받는다며 떡과 술을 한 모금씩 나눈다.



* 박종석 프로필

-호남대 미술학과 및 조선대 대학원 순수미술학과 졸업

-개인전 15회, 단체전 200회

-제6회 광주미술상 수상, 제2회 서암전통문화대상 수상

-논문·저서 ‘학포 양팽손의 예술과 사적 고찰, ‘부러진 대나무’, ‘세한을 기약하고’, ‘히말라야14좌 화보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