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고베 비엔날레에 출품하는 동료작가의 작품설치를 도와준다는 핑계로 같이 일본에 갔다.

새벽부터 부산을 떨어 광주에서 인천, 오사카를 거쳐 고베에 도착하니 저녁이다. 낯선 그러나 익숙함이 묻어나는 땅, 일본. 기시감이 든다. 우리나라와 시내 풍경과 교통체계가 비슷하다. 우리나라의 주 벤치마킹 대상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번 고베 비엔날레 국내 참여 작가는 이매리 작가와 김병택 작가가 참여했고 나는 김 작가의 도우미 역할이었다. 작가들의 숙소는 비엔날레가 진행되는 메리켄파크 바로 뒤의 호텔이었다. 주변에는 고베 포트타워, 고베 지진 메모리얼파크, 그리고 관광객 위주의 대규모 쇼핑몰들이 있다. 야경이 특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고베의 바다는 검었다. 맑고 투명하지만 검었다. 후쿠오카 앞바다를 검을 현(玄)자를 써서 현해탄이라고 한다. 그 물길이 연결돼서 그런가 생각해 본다. 바다는 쓰레기하나 없이 깨끗했다. 밤이 돼서 더욱 검은 바다에 고베 포토타워와 호텔, 쇼핑몰의 대 관람차 불빛이 가만히 흔들거린다. 밤이 되어도 숙소 주변은 조용했다.

첫날은 지리를 몰라 택시를 타고 움직였지만, 지도를 보니 고베 중심가는 생각보다 작아 보였다. 가까운 관광지는 도보로 10여 분, 시내 중심가 산노미야까지는 30여 분이면 갈 것 같았다. 걸어서 고베 구경이나 하자.

우리는 관광지가 아닌, 일본 서민들이 다니는 곳을 찾기로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우리는 이름 모를 골목 선술집에서 밤마다 일본의 정취를 눈과 창자로 느꼈다. 작은 음식점에서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를 그려주고 맥주를 얻어 마신 일도 생겼다.

숙소에서 바라다보이는 고베 대지진 기념공원에 가면 지진으로 초토화된 도시가 2년이 안 되는 기간에 어떻게 도심의 기능을 되찾았는 지 그 과정을 기록한 생생한 자료를 만날 수 있다. 고베는 1995년 강도 7의 지진으로 사망자 수 6434명, 부상자 4만3792명, 피해 규모 10조 엔이란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지진 직후 현지에서 자원봉사활동에 참가한 사람의 수는 하루 평균 2만명 이상, 3개월간 총 117만 명이라고도 말한다.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민들의 체계적인 극복 방식이었다. 일본 중앙정부가 만 하루가 지나서도 구체적 재해 대응을 못한 것과는 달리 고베 시민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해 끊어진 육로교통을 대신해 임시 여객선박을 운영하고 피난숙소정비, 식료품 보급 등 생존 인프라를 구축해 후속 피해를 줄였었다.

이후 대책위원회를 재건위원회로 바꾸고 중앙정부에 중·장기적인 도시재건 프로젝트 기획을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등의 역할을 2년간 진행했다. 그리고 10년 동안 다수의 주제로 나눠 고베 대지진 검증작업을 하고 그걸 토대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조목조목 항목으로 정리해 정책에 반영한 성과는 2013년 같은 진원지에서 일어난 강도6의 지진에서 사망자 없는 부상자 24명의 결과로 여실히 증명됐다. 왠지 후쿠시마 원전사태 대책과는 다른 모습인 것 같다. 지진에 대한 경우와 느끼는 정도가 다른 것일까.

화창한 계절, 고베 비엔날레는 작지만, 열성적인 노력으로 진행됐다. ‘항구에서 만나는 예술제’ 라는 명칭으로 항구도시 고베를 상징하는 워터프론트의 메리켄파크, 하버랜드 에리어를 비롯해 고베 중심지 산노미야에 있는 히가시 유원지, 나다구를 남북으로 잇는 뮤지엄로드 에리어를 주된 장소로 삼아 행사가 진행됐다.

비엔날레를 치르기에는 작은 약 3억엔의 예산이지만 9월부터 11월까지 66일간 진행되며 전문작가 집단과 주민참여의 묘미를 살리는 기획이 돋보였다. 지역의 특성을 살려 평소에 주민들이 이용하던 공원에 천막을 치고 전시공간을 마련했으며, 주 전시장을 중심에 두고 주변부에 전시장을 분산 배치해 작은 규모지만 지역홍보와 전시장 동선을 일관성 있게 구축한 흔적이 보였다. 특히 이번 비엔날레의 주 전시기획인 아트 인 컨테이너 국제전 영상작품들은 대부분 일본 작가들로 구성됐으며 영상을 이용하는 감각과 재료와 공간을 다루는 수준들이 대단했다.

초청 작가들과 더불어 행사를 진행하는 사람들의 열정도 대단했다. 시청에서 파견 나온 공무원들과 자원봉사자들로 꾸려진 진행팀은 우리의 손발이 되어주며 전시장 설치 및 운영, 진행에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절차준수와 기자재, 설치재료 하나하나를 소중히 하는 일본인다운 철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돌아오는 길. 도로가의 풍경은 바다를 휘돌아 감고 다리와 건물들로 빽빽이 연결돼 있어 마치 한 도시의 느낌을 주었다. 고베는 오사카에서 전철로 30여분 거리에 있어 위성도시의 성격도 있다고 한다. 인구가 밀집되고 공업단지가 도열된 곳에 있으니 비로소 일본의 저력이 느껴진다. 평소 주변 나라들을 코웃음 치고 바라보던, 암묵적으로 그렇게 교육받았던 나에게 일본의 실체가 말을 거는 것 같아 조용히 두려워졌다.

* 조정태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개인전 5회 및 단체전 다수

-2004∼2013년 5·18민중항쟁 특별전 기획(5·18기념관 및 옛 전남 도청일원)

-전 광주민미협 회장, 현 광주민예총회원, 광주민미협 회원, 광주시립미술관 전시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