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에 머물고 있는 그림 제자들과 같이들 가기로 했던 한 달간의 윈난성 (Yunnan, 雲南省) 여행이 그만 틀어졌다. 잡아둔 날짜에 녀석들이 모두 다 못 가겠다는 발뺌이었다. 못된 녀석들 사전에 말할 것이지. 한 달의 여행을 위해 나는 이미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북경에 도착했는데… 어허,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나 혼자라도 가기로 맘먹고 다시 여장을 꾸리고 있던 차에 좋아하는 후배가 여행을 같이 하자고 했다.

윈난성(雲南省)과 구이저우성(貴州省)을 돌아볼 생각이었는데 한차례 티벳 여행의 경험이 있는 선배로부터 티벳 여행을 함께 하자고 뜬금없는 연락이 왔다. 란저우(蘭州)를 통해 육로로 티벳에 간다고 하니 솔깃하지 않을 수 없잖은가. 여행은 여행을 부르고, 길은 사방각지로 막힘이 없고. 다만 여행자는 여행의 신이 호명하고 부를때 “예스”하고 동의하며 따르는 것이 인생의 자세일 것이렷다.

먼저 시안에 도착해 있던 선배에게 북경에서 시안으로 갈테니 먼저 기차표를 사놓으라고 부탁을 했다. 선배 후배 다함께 동무가 돼 광활한 중국땅의 오지를 누비게 된 것이다.

시안에서 선배를 만난 우리는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역으로 향했다. 란저우는 다음날 아침 6시 도착 예정. 매끈한 몸매의 고속열차는 거의 시속 300㎞로 달렸다. 아무 의심 없이 이야기꽃을 피우는 우리를 태우고 네 시간 정도를 달리던 기차가 갑자기 속도를 줄이고 멈췄다. 우리 일행을 제외한 기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내릴 준비를 해서 물어보니 기차의 종착역이란다.

‘환승해야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역무원에게 물으니 ‘이곳은 종착역이고 모두 밖으로 나가야 된다’고 했다.

나오는 한숨 애써 삼키고 선배에게 표를 보여 달라 했다. 아뿔사! 기차표에 인쇄된 도착지는 ‘蘭州’(란저우)가 아닌 ‘鄭州’(정저우). 소림사가 있는 정저우였던 것이다.

머릿 속에선 소림 권법으로 학처럼 날아 형의 정수리를 팍 내리치고 있었어. 서쪽 란저우를 향해 가야할 기차가 동쪽으로 4시간을 그것도 시속 300㎞로 내달려왔던 것이니 말이야.

선배의 발음이 안 좋았던가? 표를 봤을 법도 한데 정주를 난주로 보다니…. 우울한 모습으로 일행들은 역 대합실에 모여 앉아 긴급회의. 우리의 존경해마지 않는 선배님께서는 고개를 떨구고 죄인이 된채 유구무언.

다행히 열차표를 알아보니 란저우를 지나 둔황까지 가는 기차 편이 있었다. 36시간 걸리는데 좌석은 없고 입석만 남은 상태. 설마 모든 사람이 다 여기서 둔황까지 가는 사람은 아닐 터, 아주 잽싸게 기차에 올라서 빈자리에 앉아 가다가 좌석 주인이 오면 다른 자리로 또 옮기거나 해서 가면 될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표를 구해서 대기실로 들어가니 벌써 끝도 보이지 않는 긴 줄이 있었다. 아주 불쌍한 표정으로 양해를 구하며 되지도 않는 중국말로 앞에 일행이 있는 것처럼 말해가며 줄의 맨 앞으로 갔다

개찰구의 문이 열리자마자 쏜살같이 기차를 향해 맹돌진. 달리다가 우리가 탈 기차를 본 순간 우리 일행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이곳 정주가 시발역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불 켜진 기차의 창에는 빼곡한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숨이 나오다 못해 하늘이 노래졌다. 어쩔 수 없이 막강하고 초인적인 힘으로 기차에 같이 매달려 몸을 비비고 틀고 들이박아 겨우 타는데 성공. 기진맥진 움직이지도 못하고 땀만 흘리고 있는데 때는 7월. 기차의 에어컨은 초만원의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에 거의 사우나를 방불케 했다.

덥기도 덥지만 그 지독한 사람냄새 또한 죽을 지경이었다. 선 채로 얼마간 버티는데 거의 사람들의 어깨를 밟다시피 하며 검표원이 하늘을 날라 오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소림사가 있는 정저우는 달라도 뭐가 달랐어.

버벅거리는 중국말을 들은 검표원이 ‘아니 왜 한국인이 이런 기차를 탔냐’고 물었고 뭔가 실수가 있었다고 했더니 6호 칸에 가면 앉아서 갈 수 있는 표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제대로 알아들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럴 거라 믿으며 희망을 갖고 자 또 전투 시작. 우리가 탄 열차는 13호. 관우의 오관돌파처럼 사람들을 뚫고 7량의 열차를 돌파해야 했다.

바닥은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점거한 사람들을 뚫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도착. ‘아 이제 살았다’하며 표를 바꿔 달랬더니 “메이요”하며 손사레를 친다. 이미 표는 바닥났다는 것이다. 그 동안 아주 많은 여행을 했지만 이렇게 힘든 때도 없었던 거 같있다. 36시간 동안을 서서 가야하다니.

웃지도 울 수도 없는 기나긴 기차여행을 마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낭만은 고사하고 숨도 못쉴 지경의 고통스럽던 36시간. 게다가 티벳으로 가는 일도 뜻대로 되질 않았다. 티벳 소요가 얼마 전 있었던 터라 경비가 강화돼 허가증 없이는 갈 수 없어서 티벳행 또한 포기해야 한단다.

윈난 여행은 그야말로 우여곡절이 가득했던 여행이었다. 장마철로 스촨성에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로 길이 끊겨 버스에서 두 번이나 잠을 잤던 일, 해발 5000미터에 달하는 높은 고산을 이동하면서 말 타는 비용을 아끼려고 걸어서 갔다가 초죽음이 됐던 일 등 고생고생 생고생, 집 떠나서 개고생을 했다.

여행이 지칠 때쯤 나는 ‘이런 것이 인생 아니겠나’는 깨달음을 얻은 도인인냥 무상을 논할 경지에 이르게 됐다. 본의아니게 득도하게 된 것이리라.

여행을 하다보면 때론 전혀 원하지 않게 계획이 틀어져서 고생을 하는 일이 허다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런 게 다 재미난 추억이 된다. 사람 사는 것도 여행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시간이 없어서 모든 사람들이 선택하는 20도 내외의 완만한 경사의 길 대신 60도 정도의 가파른 경사의 산 사면을 선택해 오르다가 다리가 아파 오르지도 무서워서 내려가지도 못하는 상황. 마지막으로 죽을 힘으로 올라 마주한 그 찬란하고 영롱한 고산의 오색해. 만년설이 선물한 장엄한 그 물빛이 새삼 그립다.

고생하고 갔던 여행이라 더 그리운 풍경일 것이다. 기차는 떠났지만 경적소리가 오래 남는다. 그런 것이다. 내 인생은 가고 말겠지만 내 그림은 오색해의 물빛이나 기차의 경적처럼 오래 남아있기를….



* 김해성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개인전 19회

-쾰른아트페어(쾰른), All About Korea(White Box, Munich, Germany) 등 단체전 500여회

-조선대 평생교육원 전담교수, 한국미술협회 이사, 선과 색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