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계속 다녀가라는 베트남 호치민 주재원으로 있는 선배의 성화에 못 이겨 단신으로 길을 나섰다. 스케치를 겸한 여행은 화가들에게는 흔한 일이지만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을 대할 때는 본능처럼 관찰과 관심이 시작된다.

베트남은 초행이었다. 통킹만 사건 조작으로 전쟁을 일으킨 미국을 물리친 강인한 나라, 그리고 파병된 수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는 정도가 전부다.

전쟁 당시 파병된 한국군에 의한 학살 사건도 있었다. 이 때문에 따이한과는 교전까지 꺼릴 정도로 지독하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베트남 중부의 몇몇 마을에는 아직도 그 잔인한 학살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탐욕으로 인한 제국주의의 강도짓 같은 전쟁에서 한국군은 5000여 명 이상 희생되었다. 고엽제 피해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고, 오랜 고통의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지구 풍경은 항상 맑고 아름답다. 저 인과적 순리 속에 인간의 잔인성과 이기심을 감추고 욕망에 내던져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은 비행기 이코노미석 만큼 답답하고 기분을 우울하게 한다.

호치민 공항에 직원 한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는 보자마자 배고프지 않느냐면서 나를 쌀 국수 가게로 안내했다.

베트남 쌀국수는 한국에서도 먹어보았지만 독특한 향과 맛이 비교가 되질 않았다. 여행지에서 맛보는 현지 음식은 그들의 문화를 경험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중국에서 이미 향이 강하고 독특한 샹차이(고수)에 익숙해 있던 터라 어지간한 음식은 대부분 먹을 수 있었다. 나에게는 여행 중 가질 수 있는 하나의 자신감이기도 하다.

첫날은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술잔을 기울이며 시간을 보냈다. 이틀째는 선배 부부와 호치민 인근에 있는 섬에 들어가 원숭이 공원을 관람하기로 했다. 기사가 딸린 승용 SUV를 타고 출발했다. 선창에서 승용차를 실어 나르는 철선을 타고 약 10여 분 이동했다. 차 안이 답답해 밖으로 나왔다. 철선 외부 선실에서 만난 멋진 패셔니스트 노인이 포즈를 기꺼이 취해주어 감청색 맑은 바다와 어울리게 구도를 잡았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원숭이 공원은 인파로 가득했다. 잠깐 한 눈 팔면 가방과 카메라 등을 잡아채 가 버리는 원숭이들의 공격에 대한 얘기를 듣고 불안한 마음에 손가방을 앞으로 조여들고 길을 걸었다.

별일 없이 보트장까지 도착했다. 보트를 타고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수로를 따라 맹그로브 나무 사이를 아슬아슬 스쳐 올라갔다. 잠시 뒤 보트가 내려준 곳에는 역사의 현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의 게릴라 작전 구역으로 비석과 함께 습지에 숨겨진 부대를 재현해 둔 곳이었다. 작전회의, 의료, 교육시설 등을 완벽하게 갖춰진 현장에서 인간의 꿈과 미래의 자유를 위한 그들의 의지가 읽혀져 뭉클해졌다.

역사의 현장에서 잠시나마 일상을 잊고 상상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공포와 풀벌레 소리, 새소리가 뒤엉켜 정신이 혼미했다. 더위와 답답함에 큰소리를 질러 보았다. 마치 바로 옆 땅굴의 짙은 그늘 속에서 번쩍이는 눈을 부라리며 전사가 달려들 것 같은 착각에 잠깐 불안감이 스쳐 갔다. 왜곡된 욕심도 자유를 향한 사자후를 잠재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현장을 돌아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내던져진 것인가?

돌아오는 보트에서 복잡다단한 인간사를 뭐든 날려버리고 가벼운 마음만을 가져가기로 했다. 열대의 습지에서 날아오르는 귀국행 비행기에서 멀어지는 구름 사이 호치민시를 바라보며 잊혀져가지만 잊으면 안 될 우리들의 자화상을 그려본다.

땀 비엣! 호치민!



장현우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및 대학원 졸업. 중국로신미술학원 왕성렬 예술중심 수학.

-개인전 17회. 국내외 그룹초대전 500여회.

-영무예다음 창작공간 레지던시. 북경광주시립미술관 레지던시. 현재 한국미협 및 전업미술가협회 회원, 담양군 문화재단 국제예술 창작촌 총괄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