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하늘, 벌거벗은 산과 황량한 땅은 투명한 햇살 아래 부끄러움도 없이 빛난다. 공룡의 등뼈 같은 헐벗은 산들과 눈 쌓인 봉우리들, 그 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강. 사막을 닮은 황량함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나타나는 마을의 미루나무들. 하얀 몸뚱이의 미루나무들은 세월의 버거움을 한 겹 한 겹 벗겨내고 서있다. 그 몸뚱이 위로 반짝이는 초록 세상.

바람과 함께 사각사각 움직이며 흔들리고 쪼개어지는 파란 하늘. 그 틈새로 새어 나오는 반짝이는 햇살들. 아름다운 색들. 하늘에서 팅커벨의 금가루가 뿌려지는 것 같아. 초록 별들이 뜨는 것 같아. 그리고 또 하늘에 뿌려지는 싱싱한 웃음들.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빨간 옷을 입은 동자승들이 푸석푸석한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염소 떼처럼 내게로 달려온다. 외지인들이 그리 흔치 않아서인지 신기한 모양. 사탕을 하나씩 쥐여주니 새까만 얼굴에 가지런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초록 웃음이다. 척박한 땅, 각박한 삶에도 초록 웃음이라니!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척박하고 메마른 땅에 푸른 미루나무 숲처럼 그들의 웃음은 초록이다.

‘고갯길의 땅’이란 뜻의 그 이름처럼 라다크는 지리적 폐쇄성으로 인해 오랫동안 문명의 손길을 타지 않았다. 해발 3500∼5000m가 넘는 척박하고 험준한 고산지대에서 수천 년을 이어 그들만의 전통과 자족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라다크 사람들의 행복의 조건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빙하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가축의 배설물을 연료로 사용한다. 인분을 거름으로 쓰고 야크와 염소 젖으로 차를 만든다.

라다크 사람들은 너무도 혹독한 긴 기간의 겨울을 견디기 위해 4개월을 개미처럼 준비한다. 보리농사를 짓고 야크와 염소를 기른다. 한낮의 태양에 얼굴은 검게 그을리지만 힘든 노동의 시간에도 그들은 여유롭고 행복하다. 낯선 이방인에 수줍어 하지만 경계하거나 멀리하지 않는다. “가난”이란 말은 낯선 문명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편견일 뿐 그들은 그 의미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에는 늘 행복한 웃음이 함께한다. 그들에겐 갈등이 없으며, 가장 큰 욕은 “화를 잘 내는 사람”이란 말이다.

1975년 이후 은둔의 세상 라다크는 문명인에게 그 길을 허락했다. 그들 세계에 문명의 이기가 하나둘씩 스며들면서 라다크 사람들은 그들이 가난하다는 사실과 그들이 다른 세계 사람들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문명은 마치 순수한 영혼에 침투하여 오염시키는 바이러스와 같다.

우뚝 솟아 버티고 있는 산 너머로 해가 지기 시작하고 하늘은 짙푸르게 변해간다. 바람이 분다. 이곳은 바람의 땅, 크고 작은 돌들이 사나운 바람에 잘게잘게 부서져, 흩어져 나뒹구는 척박한 땅이다.

회색빛 하늘로 삐라처럼 흩어지는 까마귀 떼 뒤로 사원의 종소리가 중후하게 따른다. 남루한 옷으로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며 온몸에 세월의 고통을 새긴 노인은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좀 더 나은 삶을 기원하며 하늘을 향해 마니차를 돌리며 사원 뒤로 사라진다.

어스름한 하늘에 드리워지는 발그레한 석양. 사원을 감싸며 물들어가는 석양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불탑을 등지고 앉아 바라본 저녁노을. 장엄하다.

저물어간다는 것은 쓸쓸하거나 때론 아름다운 일인데, 이곳에서는 성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뜨겁던 햇살이 제 몸을 허물어 스스로 스러지는 일. 매일 가장 꼭대기에서부터 가장 아래로의 소멸을 겪는 일. 우리는 스러질 때에야 비로소 평온해진다. 스러지고 소멸될 즈음에야 평온해진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실로 오랜만에 저물어가는 일의 감동과 흐뭇함을 천천히 음미했다. 이곳에서의 모든 소멸에게 온 맘으로 경이를 보내고 싶었다.

하늘과 대지가 검은빛으로 섞이고 그 자리에 별이 뜬다. 하나 둘, 반짝이는 별들이.

색을 가늠키 힘든 에메랄드빛 판공초(Pangong Tso), 흰 구름이 떠가는 푸른 하늘과 흙산과 바위 언덕 그리고 하얀 쵸르텐(mchod-rten)과 바람에 나부끼는 타르쵸(Tharchog)들, 졸졸거리며 반짝이는 작은 도랑물, 바람이 발바닥을 간질이는 나긋함, 마음을 들뜨게 하는 꽃향기, 늦도록 볼 맨 목소리로 불경을 외우는 동자승, 마당을 쓰는 빗질 소리, 멀리서 들리는 야크의 울음. 미루나무 사이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

신비로운 외계 행성과도 같은 이곳 라다크의 기억들은 내게 어떤 형상을 남기게 될까? 시간은 풍경과 만나 철학으로 남고, 때로는 한 편의 시로도 남는다. 미루나무에 기대어 세상의 가장 낮은 자가 되어 생각에 잠긴다.

* 김해성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개인전 19회

-쾰른아트페어(쾰른), All About Korea(White Box, Munich, Germany) 등 단체전 500여회

-조선대 평생교육원 전담교수, 한국미술협회 이사, 선과 색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