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으로 들어서면 앞길을 가로막듯 강한 모습으로 우뚝 선 산이 있다. 물, 바람, 햇빛 그리고 흐르는 시간 속에 깎여 만들어진 이 산은 하나의 거대한 조각품일 수밖에 없다. 웅장한 기암절벽과 넓은 산야를 바라보는 큰 바위 얼굴은 풍진 세상을 뒤로하고 가슴 속 깊이 듬직함을 안겨 준다. 월출산은 그랬다.

조선시대 ‘택리지’를 쓴 실학자 이중환은 “아침 하늘에 불꽃처럼 기를 내 뿜는 기상”이라며 월출산을 ‘화승조천’(火昇朝天)이라고 했다.

월출산을 이룬 화강암의 맥반석은 사람에게 유익한 원적외선을 방출한다. 그래서 월출산을 품은 영암은 기(氣)의 고장이다. 아득히 높은 곳에 걸쳐있는 구름다리를 지나 구정봉 기암절벽의 큰 바위 얼굴과 마주 하자 100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에 압도당하는듯하다. 큰 바위 얼굴은 근엄한 강한 남성상과 부드러움을 함께 간직하고 있었다.

숨 가쁘게 왔지만 솟아오르는 힘과 벅찬 가슴을 억누르며 기암절벽과 넓게 펼쳐진 대지를 다시 한번 바라본다. 월출산은 나로 하여금 예술적 감성을 일깨우고 미의 세계를 꿈꾸는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짚어보게 한다. 큰 바위 얼굴은 나의 소망이나 비전을 뜻한다.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생각하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그를 닮지 않을까 싶다.

천천히 걸으면 세상이 넓어지고 서서 주위를 돌아보면 세상이 환해진다. 기찬묏길을 따라 산밑 한적한 새실마을에 다다랐는데 아직도 소박한 과거의 시간이 보인다.

울타리 밑에 핀 접시꽃과 막 피어나는 석류꽃, 유년시절 간식거리였던 빨간 보리수 열매, 입이 까매질 때까지 따먹었던 오디 열매가 탐스럽다.

얼마 전까지 문을 열었을 것 같은 옛날모습이 남아있는 구멍가게가 정겨운데 이 또한 시대의 변화 속에 살아가는 삶의 방식일 것이다. 아름다운 추억 속 즐거운 삶을 엮어가는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니 사뭍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진다. 고요한 민박집 뜰에서 저녁 하늘을 바라보니 달이 있다. 시인 김시습이 “남쪽 고을의 한 그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 오르더라”라고 노래한 것처럼 월출산은 달이 아름다운 산이다.

산의 영험한 기운을 받아 에너지를 가득 채우니 맑은 공기와 새벽을 깨우는 정겨운 닭 울음소리에 가슴이 환해지는 듯하다.

월출산을 둘러싼 40km의 기찬묏길 주위에는 정이 있는 소소한 마을과 가야금 산조 창시자 김창조 기념관, 일본 아스카문화의 시조 왕인박사 사적지, 시유도기(施釉陶器)의 발원지인 도기박물관, 군립 하미술관이 있는 구림전통마을이 있다.

하미술관은 3500여 점의 국내외 작품을 소장하여 지역 문화예술 소통의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마침 이 지역 출신 강철수 화백 추모 ‘미완의 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겨울이야기’ ‘간이역’ 등 지난 시절 추억이 느껴지고, 서정적인 삶의 의미가 묻어나는 작품세계는 새삼 작가의 생전 모습을 대면하는 듯하다.

또한 이 지역 작고 작가로는 광주 궁동 화실 가까이 지냈던 최연섭 화백, 예술의 강한 의지를 불태우며 작품세계를 같이 논했던 이강하 화백 등이 있다. 이분들의 ‘아다다의 집’과 ‘영산강 사람들’ 등 또한 남도의 서정과 향수,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들로써 이들의 따뜻한 정감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작품과 대화를 뒤로하고 돌아서는데 우거진 송림 사이로 옛 정취가 느껴지는 낡은 정미소가 놓여 있다. 정겨운 시간의 흐름 속으로 빠져들며 향수 어린 상념 속에 힘찬 방아 소리를 추억으로 그려본다.

진정 지난 시간의 아름다움을 되새기며 홀로 떠나온 여행에서 나 자신과 지나온 이야기로 월출산과 묏길의 소박한 마을을 둘러보는 것은 자연의 순응함과 더불어 삶을 느껴 보는 시간일 것이다.

자신을 비우고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야 할 때가 있다. 모든 일에 완벽해지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때로는 스스로에게 쉴 시간을 허락하자.

* 문명호

-조선대 미술대학 졸업

-개인전 8회, 국내외 그룹초대전 400여회

-SOAF, KIAF, 부산, 울산, 광주아트페어 참여

-대한민국미술대전 등 각 공모전 심사위원 역임

-전남도전 및 무등미술대전 초대작가, 한국미협·한국전업미술가협회·예술사회·광주사생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