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에 닿아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앤드류 매튜)

그동안 난, 많지 않은 나이에도 조바심을 갖고서 살아 왔던 것 같다. 대학 시절에는 어려운 형편 탓에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학업에만 몰두했고, 남는 시간에는 성공한 작가의 모습을 꿈꾸며 오로지 그림에만 매달렸다. 졸업 후에는 중국 북경으로 유학을 왔고 또다시 시작된 학교생활로 바쁜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항상 마음에는 여유가 없었고, 오로지 빨리 성공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작업실 밖을 나가는 것은 사치라 생각을 했다.

그런 바보 같은 생각 때문에 오랜 시간 같이 해온 여자 친구와의 여행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재 광주 시립미술관 북경 창작 레지던스에 함께 있는 황정후 작가가 먼저 여행을 가자고 했다. 처음에는 확답을 못했다. 오랫동안 작업실을 떠나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두려웠던 까닭이다.

생각해 보니 여자친구와 10년 동안 사귀면서 한 번도 여행다운 여행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며칠 동안 작업을 잊고 여행을 떠나 보기로 결심했다.

예정된 출발 시기는 가까워지고 우리 일행은 모여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런 여행은 처음인지라 계획을 짜면서부터 설레고 흥분됐다. 같이 설레는 여자 친구를 보면서 ‘왜 진작 같이 여행을 떠나보지 못했을까’라는 후회가 들었다.

여행은 북경 역에서 시작됐다. 늦은 오후 일행들과 서안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안까지는 장장 14시간이 걸린다. 기차에 오르자 곧 날은 저물고 기차는 컴컴한 밤을 가로질렀다. 창밖 너머 고요한 밤 시골 풍경을 바라보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했다. 과거 기억 속 향수도 피어올랐다. 어릴 적 어머니와 시골 할머니댁에서 일을 도와 드리고 늦은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 오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적 나는 그랬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시골의 논과 밭 그리고 좁은 길의 희미한 가로등, 집집마다 켜진 형형색색의 불빛 등의 풍경을 넋을 잃고 바라볼 때가 많았다. 무엇인지 모를 감정에 흠뻑 젖어들었던것 같다.

문득 그때 기억 속 어머니를 떠올려 봤다. 당시 어머니는 늦은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힘들고 고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쉴 생각에 안도감을 가졌을까? 아니면 가난한 집에 시집 온 걸 후회하며 자기 자신을 원망하셨을까?

계속 떠오르는 어머니 생각에 그리움을 달래고자 술을 꺼내 들었다. 독하지만 향기로운 백주 몇 잔에 곧장 취기가 올랐다. 취기 탓일까. 늦은 연세까지 자식의 유학 뒷바라지를 하셨을 부모님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은 밝았고 기차는 어느덧 서안 역에 도착했다. 낙양과 함께 중국 최고의 고도인 서안. 3000년이 넘는 역사를 품고 있는 서안은 예전부터 꼭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서안의 대표 유적지인 진시황릉과 병마용을 가기 전 당나라 시대 절세미녀인 양귀비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화청지를 둘러봤다. 화청지는 북동쪽에 위치한 온천 휴양지다.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와 화천궁을 짓고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수려한 산세와 작은 정자, 연못이 한대 어우러진 풍경은 중국의 아름다운 수묵화를 연상케 했다. 양귀비가 온천욕을 즐겼다는 연화탕을 보면서 당시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을 양귀비의 삶에 대해 상상해 봤다.

화청지를 나와 택시를 타고 병마용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동 중 택시 기사가 멀리 있는 산을 가리키며 ‘저것이 진시황릉이다’고 했다. 일행 모두가 황릉의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제 무령왕릉 보다 몇 십 배는 더 커보였다.

병마용 박물관에 들어 선 순간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흙 인형들과 말 조각들은 아직도 진시황제의 무덤을 호위하는 실제 군단 같았다. 수천 개나 되는 병마용들의 표정은 모두 달랐고, 조각 기술도 정교했다. 22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조각 작품들은 세월을 뛰어 넘어 젊은 예술가인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다음날에는 서안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둘러봤다.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성벽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우수한 서안의 성벽은 14세기 명(明)대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6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12㎞에 이르는 성벽 주변을 한참 걷는 동안 이곳에서 수없이 일어났을 전쟁과 사건들이 떠올랐다. 성벽 관람을 마치고 종루에 올라가 서안의 정경과 끝없이 펼쳐져 있는 성 외벽의 웅장함을 바라봤다. ‘내가 하고 있는 예술작품들도 서안에 있는 유적들과 유물처럼 오랜 후대까지도 남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바람을 가져 본다.

서안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낙양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또다시 창밖을 보며 이번 여행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번 여행은 남다른 여운을 남겼다. ‘앤드류 매튜’의 명언처럼 목적지에서 느껴지는 감동과 감흥 보단 여행의 과정에서 오는 생각과 느낌 그리고 회상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정성준

-조선대 미대 졸업, 러시아 샹트페테르부르크 국립미술대학 연수, 중국 북경 중앙미술학원 유화과 석사 졸업

-개인전 2회, 단체전 30회

-대한민국신미술대전 특선, 행주미술대전 특선

-현재 광주시립미술관 북경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