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님

후배가 가게를 하게 돼서 서울에 왔습니다.

작업실에 박혀 있었는데 이리 몸을 움직이니 참 좋네요~

일전에 말씀하신 절두산 성지를 찾아왔습니다.

후배 축하하러 왔다가 시간이 허락하여 스케치도 하고,

덕분에 느끼는 게 참 많네요.

모처럼 찾은 여유를 그려봅니다.





한강은 벌써 한여름 같은 오월 끝자락에 닿았다. 양화대교 주변에는 깨끗한 공기와 하늘을 벗삼은 하이킹 인파로 북적였다. 때때옷으로 갈아입은 나무 그늘 밑에는 돗자리가 많았고 곳곳에서 여유가 묻어났다. 그곳에는 절두산 성지도 있었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평소 엄숙하고 조용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몇 분을 봐서인지 천주교는 편안하게 받아들여진다.

근자에 카톨릭 신자 두 분을 알게 됐다. 두 분 모두 베드로님이라 부른다. 언젠가 베드로님 한 분께서 천주교 순교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때 그곳의 특별한 풍경에서부터 종교, 역사, 정치, 세월호 참사에 이르는 대화를 나눴던 것이 기억난다.

얼마 전 5·18 기념일과 벌써 일 년이 지나버린 세월호의 안타까운 일들이 5월의 풍경과 함께 묘하게 오버랩이 됐다. 잊은 채로 있다가도 오월이 되면 추모하는 마음이 생기면서도 왠지 모를 억울함 그리고 부족하거나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함께 떠오른다. 작년 세월호 참사 또한 그렇다. 서서히 물속으로 수장되어 죽어간 학생들과 희생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소름 돋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비극이다. 세월호 참사의 풀리지 않는 의혹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베드로님과의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역사의 흐름에 있어 종교적 탄압에 맞선 순교자의 희생과 오늘날 정치적 희생이 결국 억울한 죽음이라고 성토했다. 베드로님과의 대화가 계기가 되었을까, 다른 일 때문에 서울에 갔다가 우연히 순교지 두 곳을 찾게 됐다.

마음 한 켠에 추모의 리본을 달고 먼저 찾아 간 곳은 절두산 성지다.

옛날 이곳 절두산 봉우리는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는 평화로운 명승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병인년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는 흥선 대원군의 말과 함께 피의 박해가 시작됐다. 수없이 많은 천주교 신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참수 됐고, 이때부터 절두산은 슬픈 역사를 갖게 되었다.

베드로님께서 특별해 보였다고 말한 성지는 우뚝 솟은 벼랑 위에 접시모양의 기념관으로 자리하고 있다.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봉우리 가운데에는 김대건 신부 동상이 세워져 있고 1871년 흥선 대원군의 경고문인 척화비도 비탈 끝에 서있다. 고난을 형상화한 조각 작품들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박물관의 유물과 기록으로 수난의 시기, 순교의 현장 등 슬픈 역사의 옛모습을 상상해 볼뿐 성지 내 정원은 평화롭기만 했다. 뚜렷한 목표를 갖고 이곳을 찾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숭고함에 숙연해지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찾았을 때 방문했던 장소 중 한 곳이 생각났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또 다른 순교지로 서울역에서 그리 멀지않은 서소문공원과 약현성당이다. 자동차와 기차 그리고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찬 서울역 염천교 부근에 서소문이 있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기 전까지 서소문 밖 네거리는 상업이 활발하게 이어졌고 한편으로는 나라의 공식 처형지로 숱한 생명이 사라져간 장소라고 한다. 신유년부터 병인년에 이르는 박해로 칼 아래 스러져간 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세운 신앙의 터이며 희생으로 만든 역사의 현장이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한국 천주교 103위 성인 중 44명의 성인을 탄생시킨 이곳을 한국 최대의 순교지라고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서소문과 옛 거리는 현재 현양탑과 함께 시민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바로 그 현양탑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의 넋을 기렸다. 그래서인지 탑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역사의 흔적을 좀 더 찾아보기로 하고 인근에 자리한 약현성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르막길을 조금 오르니 성당에 앞서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이 눈에 들어왔다. 1905년에 만들어진 성당은 세월과 역사의 숨결이 배어있음을 느끼게 한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정치나 사회 그리고 어려운 삶의 이야기들과 같은 무거운 내용의 일들을 회피하듯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사람냄새 덜 나고 부정과 부패, 불합리가 눈에 보이는 사회를 너무 많이 느끼게 된다. 굳이 그러한 주제가 작업의 화두가 아니더라도 과거 5·18의 아픈 기억이나 용산참사, 억울하게 분신하고 재해로 숨진 수많은 노동자 그리고 어이없는 세월호 참사로 잃은 어린 영혼 등 남아있는 아픔들이 피할 수 없는 관심이 되고 만다. 그 모두가 정치의 책임이며 갑의 횡포라 생각된다. 사람에 대한 당연한 존엄을 정치의 색으로 덮고 가진자들의 이기적인 편법이 만든 결과로 희생이 뒤따른다. 옛날 천주교 박해도 그러했을 것이다. 숱한 고난을 겪으며 억울한 희생과 함께 신앙을 증거하고 꿋꿋하게 자생한 것이다.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천주교 성지는 역사에서 버림받아 가장 아름다운 기도의 공간이 되었다. 왜일까. 오늘따라 머릿속은 안타까운 세월호 장면으로 가득하다.

역사적으로 헛된 희생은 없음을 믿고 싶다. 진정 희생의 진실이 드러나고 남아있는 아픔이 치유되기를 그리고 그런 아픔이 결코 묻히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 오광섭

-전남대 예술대학 졸업

-개인전 3회, 한국현대미술 신기회전 등 단체전 200회

-한국미술협회, KSOPA, 신형회, KAMA, 한국현대인물화가회, 신기회, 불휘기픈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