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발원] 화교 출신이 1955년 개점 … 3代가 60년째 영업 중
2015년 02월 25일(수) 00:00 가가
〈3〉회갑맞은 중국집 ‘영발원’


1955년 문을 연 중국집 ‘영발원’은 올해 60년이 됐다. 산동성 출신인 화교 장덕충씨(2001년 작고)를 시작으로 지금은 아들 경발(사진 오른쪽)씨가 주방을 맡고 있다. 요리를 전공한 손자 보성씨는 현재 가게 카운터를 지키며 틈틈이 요리를 익히고 있다. 가운데 앉은 이는 어머니 황오녀씨. /김진수기자 jeans@kwangju.co.kr
졸업시즌이다. 출근 길 차 안 라디오에서는 졸업을 축하하는 사연들이 흘러나왔다. 1960∼1980년대 꽃다발을 든 들뜬 졸업생과 온 가족이 함께 찾던 곳이 있었다. 중국집이다. 짜장면은 물론이고, 이날은 맛있는 탕수육도 함께 먹을 수 있었다.
인기그룹 GOD의 ‘어머님께’에 등장하는 한구절,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에 담긴 의미는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더라도 사람들의 가슴에 그대로 박혔다.
정호승의 시 ‘자장면을 먹으며’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자장면을 먹으며 나누어 갖던 / 우리들의 사랑은 밤비에 젖고 /사람들의 빈 가슴도 밤비에 젖는다 / 내 한 개 소독저로 부러질지라도 / 슬픔을 섞어서 침묵보다 맛있는 / 자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시간의 흐름을 간직한 공간을 찾는 시리즈를 시작하며 가장 오래된 중국집이 궁금해졌다. 짜장면에, 중국집에 대한 추억 하나쯤 갖지 않은 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현재까지도 같은 상호로 영업중인 가장 오래된 중국집은 1945년 문을 연 광주시 충장로의 ‘왕자관’이다. 아쉽게도 이곳은 주인이 계속 바뀌었다.
두번째로 오래된 중국집은 광주시 북구 임동에 자리한 ‘영발원(永發園)’이다. 1955년 개점, 올해 딱 60년이 됐다.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영발원은 중국 산동성 출신인 장덕충(2001년 작고)씨가 문을 연 곳이다. 산동에서 인천으로 건너온 장씨는 온갖 고생을 하다 광주에서 중매로 만난 황오녀(82)씨와 결혼하며 중국집 문을 열었다.
충장로 상이군인들이 살던 동네에서 1년 동안 중국집을 운영하다 현재 가게 인근으로 옮겨왔다. 당시 이곳에는 변변한 건물 하나 없었다. 광주농고와 서림국민학교만 보고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낙찰곗돈을 받아 이발소였던 곳을 빌려 식당을 열었어. 돈이 없으니 재료는 모두 외상으로 사왔어. 우동·짜장·잡채밥 이런 걸 팔았는데 음식이 맛있었던지 꽤 장사가 됐지. 한달 장사 해서 외상 갚고 하는 식이었어. 서림국민학교 선생님들이 도시락만 가져와서 짜장국만 따로 팔기도 했었어.” 황오녀씨의 회고담이다.
초창기에는 사람 다루는 게 가장 어려웠다. 잠만 재워달라, 밥만 먹여달라며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깨끗이 씻겨 사람 행색하게 해주고, 배달 가야할 주변 지리가 익숙해질 때면 돈까지 걷어 도망가는 배달원이 여럿이었다. 술만 마시면 안 나오는 주방장도 문제였다. 황오녀씨는 김치 담그랴, 배달하랴 몸이 열개여도 부족했다.
현재 영발원 주방장은 큰 아들 경발(59)씨다. 화교들은 아버지의 일을 자연스레 배워 이어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역시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게 일을 거들었다. 주방에서 어깨 너머로 아버지가 요리하는 걸 배웠고 스물 다섯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주방을 맡았다. 대만대학에 다녔던 쌍둥이를 비롯해 4명의 동생을 뒷바라지 한 것도 그였다.
영발원의 첫 인상은 그냥 평범한 중국집의 모습이다. 기와집이었던 건물을 허물고 현재의 건물을 지은 게 1982년이다. 지금 모습은 2003년 리모델링을 거쳤다.오래된 공간의 느낌이 사라져버린 건 좀 아쉽다. 취재를 간 점심시간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등경기장과 가까운 터라 해태 타이거즈 관계자들이 많이 다녀갔다. 김응용 감독은 짜장면 곱배기를 즐겼다. 어떨 땐 곱배기에 추가로 류산슬밥을 먹기도 했다. 물 대신 항상 콜라를 마시는 것도 그의 습관이다. 며칠 전에도 다녀간 김성한 감독 역시 영발원의 단골이었다. 소탈했던 김감독은 평소에도 짜장면을 많이 먹었지만 경기에서 지고 나면 꼭 짜장면을 먹곤 했다.
‘영발원’은 지금 3대를 거치는 중이다. 장사장의 큰 아들 보원(32)씨는 요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요리를 전공했다. 아쉽게도 서양음식을 전공, 현재 서울의 양식당에서 일하고 있다. 다행히 둘째 아들 보성(29)씨가 중국음식을 공부, 가업을 잇고 있다. 전문대에서 요리를 전공한 그는 서울 명동에 자리한 대만 만두가게 딘타이펑 등 ‘남의 가게’에서 일하며 실력을 쌓았다. 지금은 가게 카운터를 보며 아버지에게 요리를 배우는 중이다.
“아무래도 집에 있으면 나태해지기 쉽다. 다양한 곳에서 경험을 쌓고 싶어 다른 가게에서도 일했다. 우리집은 고지식한 부분이 있는데 다른 곳은 어떻게 하는 지도 궁금했다. 힘들게 배워야 내 것이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장보성)
장 사장이 중요시 여기는 건 재료다. 해물은 양동시장에서, 채소는 각화도 시장에서 가져다 쓴다. 모두 30년 넘는 단골이다.
영발원의 대표 음식을 먹는다. 음식을 내오는 그릇들은 평범하기 그지 없다. 음식도 많이 모양을 내는 편이 아니었다. 인기 품목은 역시 짜장면(5000원)과 탕수육(1만7000원)이다. 예전에는 돼지기름을 썼지만 요즘에는 짜장을 볶을 때 돼지고기에서 짜낸 기름과 식용유를 절반씩 섞는다.
대구깐풍(3만원)은 영발원의 이색 메뉴다. 생대구에 밑간을 한 후 튀겨낸 것으로 매콤하고 신맛이 강한 소스가 입맛을 돋운다. 국물 없는 건짬뽕(8000원)도 독특했다. 새우, 홍합, 양배추 등 푸짐한 해산물과 채소를 면에 비벼 먹는 음식이다. 처음에는 많이 걸쭉하지만 한참 먹다 보면 국물이 생겨 또 다른 맛을 낸다.
영발원은 오후 3시∼5시까지 가게 문을 닫는다. 일요일도 쉰다. 20년 전부터 지켜온 규칙이다. 배달도 25년 전부터 하지 않는다. 사실, 동네 중국집에서 이런 결단을 내리기는 어렵다. 이날 취재중에도 식사를 할 수 있는 지 묻는 이들이 여럿이었다.
“우리 집이라고 특별한 맛이 있는 건 아니다. 요즘에는 대부분 가스를 쓰기 때문에 맛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좋은 재료와 정성, 그리고 손맛이 다다. 아버지 때부터 해오던 맛을 잊지 않으려 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내가 중국집을 맡고 나서는 매년 조금씩이라도 성장해왔다. 꾸준히 성장하고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는 것, 그거면 됐다. 세월이 지나면서 입맛이 변해가는 것도 사실이다. 10명이 짬뽕을 먹으면 10명이 느끼는 맛이 다 다르다. 아들에게 70% 정도만 맛있으면 성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장사장이 주방에서 은퇴하면 보성씨가 주방을 맡게 될 터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시작해서 주방일을 본 게 40년째다. 이제 아들이 40년을 더 하면 딱 100년이다. 우리 가게가 100년은 채웠으면 좋겠다.” 슬쩍 아들을 쳐다보는 장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보성씨에게 꿈을 물었다. “100년이 채워지는 과정에서, 그 때도 3대가 함께였으면 좋겠다.”
아들의 아들의 아들이 여전히 주방에서 짜장을 볶고 탕수육을 튀기는 것. ‘영발원’ 장씨 가족이 바라는 꿈이다. 062-525-7436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정호승의 시 ‘자장면을 먹으며’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자장면을 먹으며 나누어 갖던 / 우리들의 사랑은 밤비에 젖고 /사람들의 빈 가슴도 밤비에 젖는다 / 내 한 개 소독저로 부러질지라도 / 슬픔을 섞어서 침묵보다 맛있는 / 자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시간의 흐름을 간직한 공간을 찾는 시리즈를 시작하며 가장 오래된 중국집이 궁금해졌다. 짜장면에, 중국집에 대한 추억 하나쯤 갖지 않은 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충장로 상이군인들이 살던 동네에서 1년 동안 중국집을 운영하다 현재 가게 인근으로 옮겨왔다. 당시 이곳에는 변변한 건물 하나 없었다. 광주농고와 서림국민학교만 보고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낙찰곗돈을 받아 이발소였던 곳을 빌려 식당을 열었어. 돈이 없으니 재료는 모두 외상으로 사왔어. 우동·짜장·잡채밥 이런 걸 팔았는데 음식이 맛있었던지 꽤 장사가 됐지. 한달 장사 해서 외상 갚고 하는 식이었어. 서림국민학교 선생님들이 도시락만 가져와서 짜장국만 따로 팔기도 했었어.” 황오녀씨의 회고담이다.
초창기에는 사람 다루는 게 가장 어려웠다. 잠만 재워달라, 밥만 먹여달라며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깨끗이 씻겨 사람 행색하게 해주고, 배달 가야할 주변 지리가 익숙해질 때면 돈까지 걷어 도망가는 배달원이 여럿이었다. 술만 마시면 안 나오는 주방장도 문제였다. 황오녀씨는 김치 담그랴, 배달하랴 몸이 열개여도 부족했다.
현재 영발원 주방장은 큰 아들 경발(59)씨다. 화교들은 아버지의 일을 자연스레 배워 이어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역시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게 일을 거들었다. 주방에서 어깨 너머로 아버지가 요리하는 걸 배웠고 스물 다섯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주방을 맡았다. 대만대학에 다녔던 쌍둥이를 비롯해 4명의 동생을 뒷바라지 한 것도 그였다.
영발원의 첫 인상은 그냥 평범한 중국집의 모습이다. 기와집이었던 건물을 허물고 현재의 건물을 지은 게 1982년이다. 지금 모습은 2003년 리모델링을 거쳤다.오래된 공간의 느낌이 사라져버린 건 좀 아쉽다. 취재를 간 점심시간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등경기장과 가까운 터라 해태 타이거즈 관계자들이 많이 다녀갔다. 김응용 감독은 짜장면 곱배기를 즐겼다. 어떨 땐 곱배기에 추가로 류산슬밥을 먹기도 했다. 물 대신 항상 콜라를 마시는 것도 그의 습관이다. 며칠 전에도 다녀간 김성한 감독 역시 영발원의 단골이었다. 소탈했던 김감독은 평소에도 짜장면을 많이 먹었지만 경기에서 지고 나면 꼭 짜장면을 먹곤 했다.
‘영발원’은 지금 3대를 거치는 중이다. 장사장의 큰 아들 보원(32)씨는 요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요리를 전공했다. 아쉽게도 서양음식을 전공, 현재 서울의 양식당에서 일하고 있다. 다행히 둘째 아들 보성(29)씨가 중국음식을 공부, 가업을 잇고 있다. 전문대에서 요리를 전공한 그는 서울 명동에 자리한 대만 만두가게 딘타이펑 등 ‘남의 가게’에서 일하며 실력을 쌓았다. 지금은 가게 카운터를 보며 아버지에게 요리를 배우는 중이다.
“아무래도 집에 있으면 나태해지기 쉽다. 다양한 곳에서 경험을 쌓고 싶어 다른 가게에서도 일했다. 우리집은 고지식한 부분이 있는데 다른 곳은 어떻게 하는 지도 궁금했다. 힘들게 배워야 내 것이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장보성)
장 사장이 중요시 여기는 건 재료다. 해물은 양동시장에서, 채소는 각화도 시장에서 가져다 쓴다. 모두 30년 넘는 단골이다.
영발원의 대표 음식을 먹는다. 음식을 내오는 그릇들은 평범하기 그지 없다. 음식도 많이 모양을 내는 편이 아니었다. 인기 품목은 역시 짜장면(5000원)과 탕수육(1만7000원)이다. 예전에는 돼지기름을 썼지만 요즘에는 짜장을 볶을 때 돼지고기에서 짜낸 기름과 식용유를 절반씩 섞는다.
대구깐풍(3만원)은 영발원의 이색 메뉴다. 생대구에 밑간을 한 후 튀겨낸 것으로 매콤하고 신맛이 강한 소스가 입맛을 돋운다. 국물 없는 건짬뽕(8000원)도 독특했다. 새우, 홍합, 양배추 등 푸짐한 해산물과 채소를 면에 비벼 먹는 음식이다. 처음에는 많이 걸쭉하지만 한참 먹다 보면 국물이 생겨 또 다른 맛을 낸다.
영발원은 오후 3시∼5시까지 가게 문을 닫는다. 일요일도 쉰다. 20년 전부터 지켜온 규칙이다. 배달도 25년 전부터 하지 않는다. 사실, 동네 중국집에서 이런 결단을 내리기는 어렵다. 이날 취재중에도 식사를 할 수 있는 지 묻는 이들이 여럿이었다.
“우리 집이라고 특별한 맛이 있는 건 아니다. 요즘에는 대부분 가스를 쓰기 때문에 맛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좋은 재료와 정성, 그리고 손맛이 다다. 아버지 때부터 해오던 맛을 잊지 않으려 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내가 중국집을 맡고 나서는 매년 조금씩이라도 성장해왔다. 꾸준히 성장하고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는 것, 그거면 됐다. 세월이 지나면서 입맛이 변해가는 것도 사실이다. 10명이 짬뽕을 먹으면 10명이 느끼는 맛이 다 다르다. 아들에게 70% 정도만 맛있으면 성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장사장이 주방에서 은퇴하면 보성씨가 주방을 맡게 될 터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시작해서 주방일을 본 게 40년째다. 이제 아들이 40년을 더 하면 딱 100년이다. 우리 가게가 100년은 채웠으면 좋겠다.” 슬쩍 아들을 쳐다보는 장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보성씨에게 꿈을 물었다. “100년이 채워지는 과정에서, 그 때도 3대가 함께였으면 좋겠다.”
아들의 아들의 아들이 여전히 주방에서 짜장을 볶고 탕수육을 튀기는 것. ‘영발원’ 장씨 가족이 바라는 꿈이다. 062-525-7436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