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김향남 수필가 - 다시 꿈을…
2024년 01월 08일(월) 00:00 가가
어젯밤 꿈이 어땠더라?
무슨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거나 몹시 기다리는 일이 있을 때면 으레 꿈을 떠올려보곤 한다. 어떤 꿈을 꾸었는지, 꾸고 난 뒤의 기분은 어땠는지에 따라 일의 성패를 가늠해보는 버릇 때문이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꿈보다 해몽이 좋을 때도 많지만, 나는 꿈과 밀착관계인 것만은 확실하다.
꿈에는 낮에 보고 들은 것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전혀 엉뚱한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황당하고 무질서하고 말도 안 되는 것 투성이다. 꿈은 내 의지와는 별 상관도 없는 듯하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기를 바란다고 그런 꿈이 꾸어지던가? 황금 돼지꿈을 꾸고 싶다고 그게 그렇게 되었나?
꿈은 매번 나를 배반한다. 꿈은 나를 통과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만 내 원대로 된 적은 기억에 없다. 뜻하지 않게 달콤한 꿈을 꿀 때도 있었다. 가령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만난다거나 강물 위에 몸을 누이고 배 띄우듯 두둥실 떠 있는 꿈 같은 거. 그런 꿈을 꾸고 나면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꿈은 ‘잠자는 동안 경험하는 일련의 심리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혹은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을 일컬을 때도 꿈이라고 한다. 잠을 통해 꾸는 것이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나 다 같이 꿈이라 불린다. 그러니까 꿈이란 딱히 손에 잡히지는 않으나 분명히 있긴 있는 것, 신기루처럼 있다 없다 하는 것인 모양이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도 않는 꿈은 나도 모르는 나의 가장 은밀하고 사소한 영역인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나의 무의식이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활개를 쳐보는 것일 수도. 하지만 그것은 아무 맥락 없는 것이라기보다 이미 있는 것들, 즉 경험한 내용의 변형이거나 재편성된 것일 확률이 높다. 낮에 경험한 일들이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꿈의 재료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런 속성 때문일까. 오랜 옛날부터 꿈은 사람들의 좋은 얘깃거리가 돼주었다. 꿈에는 무엇이나 가능하며, 안 되는 것이 없으므로 어떤 이야기라도 꾸며낼 수 있었다. 꿈을 빌려 제 안의 욕망을 털어놓을 수도 있었고,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도 했으며, 앞날을 예견해보기도 했다. 도깨비방망이 휘두르듯 하룻밤 사이를 뚝딱 다녀간 그 꿈들은, 발칙한 욕망에 사로잡힌 이에게 인생의 의미를 일깨우는 수단으로, 또는 세상에 대한 쓴소리를 담거나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표현하는 틀로도 활용되었다.
‘삼국유사’의 ‘조신’이나 ‘구운몽’의 ‘성진’, 그들의 꿈은 현실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사랑, 부귀, 성공, 재물, 권력 같은 것들. 그것은 분명 본분을 망각한 세속적이고 헛된 욕망이었다. ‘대관재기몽’의 주인공, 그가 꾸었던 것도 헛된 것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헛된 꿈을 경계하라는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욕망 혹은 꿈의 덧없음을 깨닫고 현실을 직시하며 살라는 교훈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꼭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왜냐면 꿈을 꾸는 동안, 그리고 그 꿈을 기록하는 동안 얼마나 행복했을까 상상이 되기 때문이다. 현실과는 다른 삶을 살아본다는 것,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가져보는 것, 생각대로 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큰 성취이며 매혹일 것인가.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는 그 순간들이야말로 꿈꾸는 행복, 꿈꾸는 자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진실로 경계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꿈 없음’이 아닐까. 꿈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 꿈마저도 꿀 수 없다는 것. 그것처럼 절망적이고, 그것처럼 막막하고, 그것처럼 쓸쓸한 건 없을 테니까. 꿈마저 없다면 우리의 가슴은 얼마나 딱딱하고 세상은 또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우리는 그 무엇에도 닿지 못한 채 숨 막혀 죽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밤의 휴식과 꿈이라는 숨구멍이다.
TV를 보다가 문득 한 가수의 노래를 들었다. ‘…꿈은 버리고 두 발은 딱 붙이고 세상과 어울려 살아가면 되는데…’ 절규하듯 토해내는 음성이 눈길을 끌고 마음을 움직이고 다시 꿈을 꾸게 하였다. ‘꿈은 버리고’라고 했지만, 그것을 어찌 버릴 수 있으랴. 그래, 다시 꿈을 꾸자. ‘춥고 아프고 위태로운’ 밤에는 꿈을 꾸자. 다시 꿈을, 희망을….
무슨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거나 몹시 기다리는 일이 있을 때면 으레 꿈을 떠올려보곤 한다. 어떤 꿈을 꾸었는지, 꾸고 난 뒤의 기분은 어땠는지에 따라 일의 성패를 가늠해보는 버릇 때문이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꿈보다 해몽이 좋을 때도 많지만, 나는 꿈과 밀착관계인 것만은 확실하다.
꿈은 매번 나를 배반한다. 꿈은 나를 통과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만 내 원대로 된 적은 기억에 없다. 뜻하지 않게 달콤한 꿈을 꿀 때도 있었다. 가령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만난다거나 강물 위에 몸을 누이고 배 띄우듯 두둥실 떠 있는 꿈 같은 거. 그런 꿈을 꾸고 나면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꿈은 ‘잠자는 동안 경험하는 일련의 심리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혹은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을 일컬을 때도 꿈이라고 한다. 잠을 통해 꾸는 것이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나 다 같이 꿈이라 불린다. 그러니까 꿈이란 딱히 손에 잡히지는 않으나 분명히 있긴 있는 것, 신기루처럼 있다 없다 하는 것인 모양이다.
‘삼국유사’의 ‘조신’이나 ‘구운몽’의 ‘성진’, 그들의 꿈은 현실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사랑, 부귀, 성공, 재물, 권력 같은 것들. 그것은 분명 본분을 망각한 세속적이고 헛된 욕망이었다. ‘대관재기몽’의 주인공, 그가 꾸었던 것도 헛된 것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헛된 꿈을 경계하라는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욕망 혹은 꿈의 덧없음을 깨닫고 현실을 직시하며 살라는 교훈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꼭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왜냐면 꿈을 꾸는 동안, 그리고 그 꿈을 기록하는 동안 얼마나 행복했을까 상상이 되기 때문이다. 현실과는 다른 삶을 살아본다는 것,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가져보는 것, 생각대로 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큰 성취이며 매혹일 것인가.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는 그 순간들이야말로 꿈꾸는 행복, 꿈꾸는 자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진실로 경계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꿈 없음’이 아닐까. 꿈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 꿈마저도 꿀 수 없다는 것. 그것처럼 절망적이고, 그것처럼 막막하고, 그것처럼 쓸쓸한 건 없을 테니까. 꿈마저 없다면 우리의 가슴은 얼마나 딱딱하고 세상은 또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우리는 그 무엇에도 닿지 못한 채 숨 막혀 죽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밤의 휴식과 꿈이라는 숨구멍이다.
TV를 보다가 문득 한 가수의 노래를 들었다. ‘…꿈은 버리고 두 발은 딱 붙이고 세상과 어울려 살아가면 되는데…’ 절규하듯 토해내는 음성이 눈길을 끌고 마음을 움직이고 다시 꿈을 꾸게 하였다. ‘꿈은 버리고’라고 했지만, 그것을 어찌 버릴 수 있으랴. 그래, 다시 꿈을 꾸자. ‘춥고 아프고 위태로운’ 밤에는 꿈을 꾸자. 다시 꿈을, 희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