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고경명이 깃발을 들자 호남의 선비들이 몰려들었다
2021년 04월 02일(금) 10:00 가가
新 호남 의병 이야기 <6> 전란 속에 빛난 선비들의 네트워크 ①
고경명·김천일·최경회·임계영·김덕령·변사정 등
지역 의병들, 전국구 의병들과 연대해 왜적에 맞서
‘근왕척왜’ 외치며 한양으로 북진한 의병, 호남이 유일
고경명·김천일·최경회·임계영·김덕령·변사정 등
지역 의병들, 전국구 의병들과 연대해 왜적에 맞서
‘근왕척왜’ 외치며 한양으로 북진한 의병, 호남이 유일


김천일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592년 5월 16일 양산룡, 양산숙, 서정후 등과 함께 나주 정수루에서 거병했다. 그는 북진해 강화도에 진을 치고 선조의 의주행재소와 호남, 충청, 경상을 연결하는 핵심 거점을 구축했으며, 서울 수복작전에 나서 처음으로 입성했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 등장하는 임진왜란 의병장 34명 가운데 근왕척왜(왕을 모시고 ?적을 척결함)를 외치며 북진했던 소위 ‘전국구 의병’은 충렬공 고경명, 문열공 김천일, 충의공 최경회, 삼도 임계영, 충장공 김덕령, 도탄 변사정 등이다. 이들은 큰 세력을 형성하며, 각지의 선비들을 모았고,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함경도 등을 오가며 관병, 지역 의병들과 연대해 왜적들과 맞섰다. 나머지는 이들 전국구 의병에 참가하거나 각 지역으로 침입한 왜적들을 막는 역할을 했다. 이들 의병장들은 임란이 발발하자 관직에 있으면서 또는 같은 스승을 모시며 동문수학하는 과정에서 맺은 인맥을 통해 서로 정보를 주고 받았다. 임란 과정에서 보여준 호남 의병의 혁혁한 전공은 이 같은 네트워크에 기반한 협력 시스템이 가동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거병을 격려하는 격문을 작성, 곳곳에 전달해 의병과 무기, 식량을 모으고, 왜적에 밀려 열세에 있는 다른 지역의 의병을 지원하면서, 한양을 향해 북진한 의병은 호남 의병이 유일했다.
‘근왕척왜’를 외치며 북진한 호남의 ‘전국구 의병장’
충렬공 고경명이 깃발을 들자 호남 각지의 선비들이 몰려들었다. 율곡 이이의 종사관을 지낼 정도로 중앙인맥이 탄탄한데다 아들 종후, 인후 등 3부자가 문과에 급제하는 등 지역 내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고경명은 1592년 5월 29일 담양 추성관에 의병청을 설치했으며, 찾아온 선비들에게 각각의 역할을 부여하는 등 군대를 정비해 6월 1일 출정했다. 모인 장병만 6,000명이었다. 그는 전라좌도 의병대장으로 이들을 이끌고 북진했다. 유팽로, 안영, 양대박 등이 종사관, 최상중, 양사위, 양회적 등이 군량을 모으는 모량유사(募糧有司), 박광옥이 그 외에 다른 물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양산숙과 곽현이 의주의 선조에게 고경명의 출사표를 전하는 중책을 맡았다. 김덕령이 형 김덕홍과 함께 참가했다가 김덕령은 모친을 돌보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고경명은 그러나 거병한 지 40일이 지난 7월 10일 충남 금산성 전투에서 왜적과 맞서다 장렬히 전사했다. 그의 전사는 각지에서 의병들이 들불같이 일어서는 기폭제가 됐다.
병기와 군량을 모으기 위해 잠시 금산을 떠났다가 살아남은 큰아들 종후는 1592년 12월 복수군을 편성해 진주성으로 향했으며, 진주성 제2차 전투에서 전사했다. 종후를 따라 종군한 하인 봉이와 귀인 역시 주인을 따라 순국했으며, 광산구 대촌동의 포충사 홍살문 밖에는 이 두 명의 하인을 기리는 비가 서 있다.
문열공 김천일은 임란이 발발하자 우선 광산 고경명, 화순 최경회에게 격문을 보내고, 외삼촌 이광익을 찾아가 쌀 300석, 말 50필을 얻어 나주에서 거병했다. 김천일의 격문을 보고 송제민과 서정후가 종사관으로, 양산룡, 임환, 이광우 등이 함께 했다. 전라우도 의병장으로 경기도 수원 독산산성을 거쳐 강화도에 진을 친 뒤 1593년 4월 18일 도원수 권율과 가장 먼저 서울 수복에 나섰다. 이후 진주성에 진입한 뒤 최경회, 고경명의 큰아들 복수의병장 고종후, 충청병사 황진, 김해부사 이종인, 사천현감 장윤, 거제현령 김준민, 해미현감 정명세, 웅(熊)의병장 이계열·비(飛)의병장 민여운·표(彪)의병장 강희보·강희열·오유·양산숙·조인호·문홍헌·오비·김인흔 등과 최후의 일전을 치르고 전사했다.
나주 출신 충의공 최경회는 고경명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경명의 사위 문홍헌에게 듣고 형인 경운, 경장과 의병청을 설치했다. 5,000여 명의 의병과 600여 석의 군량미를 모은 그는 전부장(前部將)에 판관 송대창, 좌부장(左部將)에 군수 고득뇌, 후부장(後部將) 현감 허일, 우부장(右部將) 경력(經歷) 권극평 등을 임명했다. 자신의 아들 홍기·홍적, 형 경운의 맏아들 홍재, 경장의 맏아들 홍우 등에 막좌를 맡겨 돕게 하고, 문홍헌을 참모로 삼았다. 최경회가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전사하자 형 경운은 나주에서 선의문을 부장, 김윤명을 종사관으로 삼아 이광중, 강항, 아들 홍재 등과 다시 거병해 왜적과 맞섰다.
삼도 임계영은 평소 깊이 사귀던 박광전, 정사제, 장흥 진사 문위세, 능성(능주)현감 김일복 등과 거병을 논의하다 1592년 7월 20일 보성관문에서 의병을 모았다. 전라좌의병장으로 추대된 뒤 정사제를 종사관, 문위세를 양사관(糧飼官), 최억남을 훈련관, 박광전의 아들 박근효를 참모, 홍의장군 소상진과 남응길을 별장으로 각각 임명했다. 화순 능주군수 김일복, 우산 안방준, 문위세의 네 아들 원개·영개·형개·홍개과 조카 희개, 임계영의 조카 임제, 염세응·세경 형제, 이충량, 김홍업, 선경룡, 김언립, 백민수, 황윤기, 임영개, 양간의 아들 자하 등도 군사를 이끌고 왔다. 순천수성장 장윤도 합류했다.
김덕령은 모친상중에 김응회, 송제민, 이인경 등의 권유로 1593년 11월 거병했다. 권율은 김덕령의 의병을 초승군(超乘軍)이라 불렀고 광해군은 덕령에게 익호장군의 호를 하사했다. 선조가 덕령이 이끄는 의병을 충용군이라 명하고, 그 휘하에 전국 의병들을 소속시켰다. 그는 장사 최담령을 부장으로 삼았다.
도탄 변사정은 젊은 시절 호남지역 젊은 선비들과 교류하며 송강 정철, 중봉 조헌 등과도 서울에서 만나 교류했다. 그가 거병하자 도체찰사로 있던 송강 정철은 그의 비장(裨將) 이잠과 300여 명의 군사를 보내고 의병군에 ‘적개(敵慨)’라는 칭호를 내렸다. 호남, 영동, 호서 등에서 그의 격문을 보고 김여중, 김여강, 김성, 김의용 동의 선비와 18세 청년 방원진, 김정, 최준, 박의, 최윤, 오서익 등 의기남아들이 합류했다. 북진하면서 충북 옥천에서 충청도 의병장 김홍민과 합세해 상주, 선산, 개녕, 금산 등의 왜적을 공격했다.
각지와 연계하며 지역을 지킨 ‘지역구 의병장’
괴정 최시망은 1592년 10월 나주로 내려와 의병을 모집했는데, 홍민언·홍민성 형제가 여기에 참여하고, 별장 정충훈, 종질 최희립 등도 함께 했다. 최시망과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홍민언·홍민성은 스승인 조헌의 의병에 참여하기 위해 충청도로 가다가 장성 갈재에서 조헌의 전사 소식을 듣고 돌아와 최시망 의병에 합류했다. 최시망과 홍씨 형제는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도래마을 태생으로, 이후 두 가문은 수백 년 동안 같이 살며 명절 때마다 소고기를 보내는 등 미풍을 지켜오고 있다고 한다.
왕득인, 그의 아들 왕의성,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등은 구례 석주관을 지킨 7의사다. 왕득인·왕의성 부자를 제외한 이정익 등 5명은 구례 광의면 방광리 출신 지기지우들로, 이들은 인근에서 거병한 유격장 조경남을 찾아가 지략과 전술을 익혔다. 이들은 화엄사에 쌀과 승병을 요청했으며, 석주관 전투에서 화엄사 스님 153명도 함께 전사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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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5월 29일 담양 추성관에서 거병한 고경명이 수도인 한양으로 북진하는 모습. 추성관 내에 전시돼 있다. |
문열공 김천일은 임란이 발발하자 우선 광산 고경명, 화순 최경회에게 격문을 보내고, 외삼촌 이광익을 찾아가 쌀 300석, 말 50필을 얻어 나주에서 거병했다. 김천일의 격문을 보고 송제민과 서정후가 종사관으로, 양산룡, 임환, 이광우 등이 함께 했다. 전라우도 의병장으로 경기도 수원 독산산성을 거쳐 강화도에 진을 친 뒤 1593년 4월 18일 도원수 권율과 가장 먼저 서울 수복에 나섰다. 이후 진주성에 진입한 뒤 최경회, 고경명의 큰아들 복수의병장 고종후, 충청병사 황진, 김해부사 이종인, 사천현감 장윤, 거제현령 김준민, 해미현감 정명세, 웅(熊)의병장 이계열·비(飛)의병장 민여운·표(彪)의병장 강희보·강희열·오유·양산숙·조인호·문홍헌·오비·김인흔 등과 최후의 일전을 치르고 전사했다.
나주 출신 충의공 최경회는 고경명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경명의 사위 문홍헌에게 듣고 형인 경운, 경장과 의병청을 설치했다. 5,000여 명의 의병과 600여 석의 군량미를 모은 그는 전부장(前部將)에 판관 송대창, 좌부장(左部將)에 군수 고득뇌, 후부장(後部將) 현감 허일, 우부장(右部將) 경력(經歷) 권극평 등을 임명했다. 자신의 아들 홍기·홍적, 형 경운의 맏아들 홍재, 경장의 맏아들 홍우 등에 막좌를 맡겨 돕게 하고, 문홍헌을 참모로 삼았다. 최경회가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전사하자 형 경운은 나주에서 선의문을 부장, 김윤명을 종사관으로 삼아 이광중, 강항, 아들 홍재 등과 다시 거병해 왜적과 맞섰다.
삼도 임계영은 평소 깊이 사귀던 박광전, 정사제, 장흥 진사 문위세, 능성(능주)현감 김일복 등과 거병을 논의하다 1592년 7월 20일 보성관문에서 의병을 모았다. 전라좌의병장으로 추대된 뒤 정사제를 종사관, 문위세를 양사관(糧飼官), 최억남을 훈련관, 박광전의 아들 박근효를 참모, 홍의장군 소상진과 남응길을 별장으로 각각 임명했다. 화순 능주군수 김일복, 우산 안방준, 문위세의 네 아들 원개·영개·형개·홍개과 조카 희개, 임계영의 조카 임제, 염세응·세경 형제, 이충량, 김홍업, 선경룡, 김언립, 백민수, 황윤기, 임영개, 양간의 아들 자하 등도 군사를 이끌고 왔다. 순천수성장 장윤도 합류했다.
김덕령은 모친상중에 김응회, 송제민, 이인경 등의 권유로 1593년 11월 거병했다. 권율은 김덕령의 의병을 초승군(超乘軍)이라 불렀고 광해군은 덕령에게 익호장군의 호를 하사했다. 선조가 덕령이 이끄는 의병을 충용군이라 명하고, 그 휘하에 전국 의병들을 소속시켰다. 그는 장사 최담령을 부장으로 삼았다.
도탄 변사정은 젊은 시절 호남지역 젊은 선비들과 교류하며 송강 정철, 중봉 조헌 등과도 서울에서 만나 교류했다. 그가 거병하자 도체찰사로 있던 송강 정철은 그의 비장(裨將) 이잠과 300여 명의 군사를 보내고 의병군에 ‘적개(敵慨)’라는 칭호를 내렸다. 호남, 영동, 호서 등에서 그의 격문을 보고 김여중, 김여강, 김성, 김의용 동의 선비와 18세 청년 방원진, 김정, 최준, 박의, 최윤, 오서익 등 의기남아들이 합류했다. 북진하면서 충북 옥천에서 충청도 의병장 김홍민과 합세해 상주, 선산, 개녕, 금산 등의 왜적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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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7월 20일 보성에서 거병한 임계영이 마을에 가뭄이 들자 조성한 축내저수지. 원래 저수지 가운데 3개의 섬을 만들어놓았으나 일제 때 확장공사를 하며 2개는 헐어 제방을 쌓는데 써버렸다. 그의 호 삼도와 축내라는 마을 이름도 이 저수지에서 생겼다. |
괴정 최시망은 1592년 10월 나주로 내려와 의병을 모집했는데, 홍민언·홍민성 형제가 여기에 참여하고, 별장 정충훈, 종질 최희립 등도 함께 했다. 최시망과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홍민언·홍민성은 스승인 조헌의 의병에 참여하기 위해 충청도로 가다가 장성 갈재에서 조헌의 전사 소식을 듣고 돌아와 최시망 의병에 합류했다. 최시망과 홍씨 형제는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도래마을 태생으로, 이후 두 가문은 수백 년 동안 같이 살며 명절 때마다 소고기를 보내는 등 미풍을 지켜오고 있다고 한다.
왕득인, 그의 아들 왕의성,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등은 구례 석주관을 지킨 7의사다. 왕득인·왕의성 부자를 제외한 이정익 등 5명은 구례 광의면 방광리 출신 지기지우들로, 이들은 인근에서 거병한 유격장 조경남을 찾아가 지략과 전술을 익혔다. 이들은 화엄사에 쌀과 승병을 요청했으며, 석주관 전투에서 화엄사 스님 153명도 함께 전사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