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2’

노란 은행잎, 바스락거리는 낙엽, 푸른 하늘, 멋들어진 미술관 건물, 세월의 향기가 묻은 한옥…. 늦가을 정취 속으로 들어간 조각 작품들은 한폭의 멋진 풍경화였다.

담양 대담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대길(전남대 교수) 조각가 전시회에 다녀왔다. 내년 8월 정년을 앞두고 있는 그가 42년 교직 생활을 갈무리하며 열고 있는 전시다. ‘대학시절,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늘 돌을 쪼고 있던 김대길 선배’를 기억하는 대담미술관 정희남 관장과 2년 여전부터 준비했던 전시인 터라, 미술관 야외 공간과 잘 맞아떨어진 작품 구성과 배치는 ‘조각’의 매력을 잘 보여준다.

“제가 끊임없이 추구해온 게 이번 전시 주제이기도 한 생명력입니다. 작품이나 인생이나 갖고 있어야할 가장 중요한 요소죠. 정년은 끝이 아니예요. 긴 여정의 한 부분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제가 변화하는 모습의 ‘일부’라도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Vitality-아름다운 여정’을 주제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띄는 건 흑백 모노톤이 주조를 이루던 데서 한발짝 나아간 과감한 색채의 차용이다.

“자연에서, 인체에서 얻어낸 생명력을 테마로 작업해왔어요. 생명을 만드는 ‘씨앗’은 그 출발이죠. 인체가 완벽한 모습으로 완성되기 전 손가락, 발가락, 가슴의 형태를 잉태하고 있기 때문이죠. 암수, 음양, 검은 것, 흰 것 등 ‘대조’를 통해 상징적인 개념에 실체를 부여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언젠가부터 왜 조각은 대리석, 브론즈 등 기존 물성을 살리는 쪽으로만 작업할까, 평면 작업의 다양한 색채를 끌어들이지 못한 걸까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다면 색을 써 보는 김에 적극적으로 쓰자. 확 뒤집어보자 싶었어요. 전통 오방색을 응용하고, 또 섞기도 하면서 생명력을 불어 넣으려 했습니다.”

작은 연못 등이 어우러진 전시장 야외에 설치된 ‘생명력’ 시리즈는 기둥, 원형 등 다양한 형태로 구성돼 있다.

“제 작품이 상징성이 강해서 개인적으로 소유하기가 힘들다고들 하세요. 제가 생각하는 작품은 ‘공유’의 개념이 강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가 딱 맞죠. 제 자신부터 자연의 변화에 따라 이 작품들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궁금합니다.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자연이 우연히 만들어내는 풍경들과 어울려 어떤 모습이 될지 기대되요. 이게 바로 새로운 영감을 얻는 과정입니다.”

실내에 전시된 소품들은 ‘장미정원’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군상’ 처럼 구성했다. 각각의 작품은 고향 돌산바다의 이미지를 차용하기도 했고 캔디도장 등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도 사용했다. 그는 작품에 맞는 재료와 작업 형태를 꾸준히 탐구했고 ‘생명력’이라는 주제에 맞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받아들인다.

“작품에 장미정원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꽃만 있는 건 아니예요. 인체의 부분도 있고 바다 이미지도 있구요. 또 다양한 문양을 넣고 회화적인 요소를 넣다보니 정원의 개념으로 확장됐어요. 생기발랄함이 살아 있는 색채는 ‘생명’의 또 다른 버전입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강렬한 경험 중 하나는 1997년 밀라노 두오모 성당 앞에서 들었던 오페라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었다, 수백명의 합창단과 나나 무수쿠리가 부르는 노래 중 “가라 나의 생각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라는 부분이 마음에 꽂혔다. 예술가가, 인간이 가져야할 자유로움을 대변하는 것, 예술가들이라면 누구나 갈구하고 꿈꾸는 것이었다. 그의 좌우명이 됐을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늘 이르는 말이 됐다.

제자들 이야기를 하며 그는 눈물을 보였다. 42년간 학교에 가지 않은 날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학교에서 살았던 그는 “학생들이 내 스승이었다고,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교육 현장에서 젊은 제자들과 호흡하다 보니까 자꾸 젊어지더군요. 애써 변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던 듯해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지. 작업의 변화를 유도하는 학생들은 제 스승입니다. 많이 했던 말이 ‘생각을 키워야한다’는 것이었어요. 저 역시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게으름은 조각가에게 죄악과 같은 것이라는 말도 자주 합니다.”

그의 비행기 마일리지는 60만 마일에 달한다. 90년대초부터 목돈이 생기면 유럽 등지로 날아갔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을 넓히고 확장시키는 데 여행만큼 좋은 건 없었다. 그 자신이 90년대 1년 8개월 파리에 머물며 만났던 미니멀리즘, 다다, 이슬람문화는 큰 자양분이 됐고, 이후에는 학생들을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카데믹한 것과 함께 현대적·산업적 이기(利器)도 적극 활용해 늘 도전하고 싶다”는 그는 영원한 청년이었다. 눈 내리는 겨울, 대담미술관과 담양의 자연, 그리고 김대길의 조각이 만들어내는 근사한 풍경을 기대해본다. 10월말 개막한 전시는 내년 2월말까지 이어진다.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