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특별 법정에 선 아돌프 아이히만은 법정에 설치된 방탄유리 상자 안에서 등을 곧추세우고 앉아 차분히 자신을 변호했다. “내 죄는 나의 복종, 국가 질서와 공무원 선서에 대한 복종이다. 나는 탐욕과 열정을 가지고 유대인을 학대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정부가 했다. 나는, 나의 복종심을 잘못 사용했던 통치자들을 고발한다.”

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된 1939년 말 독일 베를린에서 독일노동당(NSDAP)의 ‘유대인 문제 담당과’ 과장으로 일하며 6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의 강제수용소’로 보낸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대 정책의 의미와 목적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며 “우리는 한마디로 합법적인 범죄의 시대를 살았다”고 강변했다.

‘과장’이라는 비교적 낮은 지위 덕분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피할 수 있었던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살던 중 1960년 5월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발각됐고, 비밀리에 관에 실려 이스라엘로 공수됐다. 그는 예루살렘 법정에서 2차 대전 당시 자신이 수행했던 역할을 정확하게 밝혔지만, 개인적인 죄는 인정하지 않았다. 단지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고, 자신은 나치 권력자들의 제물이었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단호했다. “피고인(아이히만)이 유대인 수천 명을 태워 아우슈비츠 등으로 보낸 모든 기차는 그가 직접, 의도적으로 학살에 참여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피고인의 법적·도덕적인 책임은, 사람들을 직접 가스실로 던진 자들의 책임과 비교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요즘 우리나라의 적폐청산 과정을 들여다보면 과거의 사례와 너무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다.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맡은 역할을 떠나, 수사에 직면한 이들은 대부분 ‘공직자로서 소임을 다했을 뿐’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최고 결정권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고, ‘관례’라는 단어 뒤에 숨으려 들었다. 양지를 찾고 음지를 기피하는 것인 사람의 본성이라지만, 국민에게 봉사해야 할 공직자라면 좀 더 책임 있는 생각과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홍행기 정치부장 redpla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