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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재의 세상만사] “기자놈들, 느그들이 문제여”

2017. 01.13. 00:00:00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은 하마터면 묻힐 뻔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라며 그토록 반대하던 개헌을 갑자기 박근혜 대통령이 들고 나왔을 때 그랬다. 이제 온통 개헌 논란으로 날을 지샐 판이었다. 하지만 하루도 못 가서 잠잠해졌다. 태블릿 피시 때문이었다.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였다. 이어서 몇 달 동안 자고 나면 깜짝깜짝 놀랄, 별의별 게 다 쏟아져 나왔다.

언론이 모처럼 할 일을 했다는 칭송이 따랐다. ‘쓰레기 더미 속의 보석’을 발견한 그 방송사의 앵커는 더욱 인기가 높아졌다. 그동안 ‘기레기’ 소리를 듣던 다른 기자들도 덩달아 기를 펼 수 있게 됐다. 새삼 언론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기에. 때로는 권력의 칼에 때로는 자본의 칼에 휘어지고 꺾이는 펜도 많았기에.

하지만 지금은 수많은 ‘펜’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났다. 공무원들이 승진에 목숨을 건다면, 기자들은 특종을 위해 온몸을 바친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닭 한 마리를 놓고 열흘 굶은 사자’처럼 달려든다.(여기에서의 닭은 그 닭이 아니니 오해 없으시기를)

오래된 옛날 일선 기자 시절을 돌아보면 우리도 그랬다.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때로는 도둑질도 서슴지 않았다. 빈 사무실에 들러 서랍 속을 뒤진 뒤 서류를 훔쳐 오는 일도 다반사였다. 지금 같으면 바로 절도죄로 수갑을 찰 일이다. 하지만 당시엔 그렇게 하지 못하면 무능한 기자로 찍히던 시절이었다. 글만 잘 쓴다고 기자를 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멘탈’이 강해야 했다. 시쳇말로 ‘조지는’(비판하는) 기사를 쓰고도 미안한 마음 같은 것을 가지면 안 됐다. 직업윤리? 그런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근래 직업윤리 또는 보도윤리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최순실의 딸 정유라 체포 소식 때문이었다. 정유라는 덴마크에서 어느 종편 기자의 신고로 체포됐다. 방송사는 체포 현장을 단독 보도했다. 자기가 신고하고 자기가 특종하고.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혹시 ‘기자는 관찰자에 머물러야 한다’는 기자윤리를 저버린 것은 아닐까.

두 가지 예화를 들 수 있겠다. 우선 저 유명한 한 장의 보도사진을 보자. 아프리카의 참상을 알린 케빈 카터의 ‘독수리와 소녀’. 몇 년 전 ‘퓰리처상 사진전’이 광주에서도 열린 적 있으니 직접 보신 분도 많을 줄 안다. 이 사진에는 사연이 있다. 20여 년 전 일이다. 사진작가 케빈은 내전 중인 수단을 찾았다. 어느 날 그는 시체를 먹고 살아가는 한 마리 커다란 새를 발견했다. 그 새 앞에는 배가 고파 힘없이 주저앉은 어린 소녀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케빈은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그 사진은 전쟁의 참혹함을 상징적으로 보여 줬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에게 퓰리처상의 영예를 안겼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죽음 앞에 놓인 소녀를 외면했다는 비난에 시달렸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기자는 사건을 보도만 할 뿐 개입하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는 하등의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자윤리 말고 근본적인 인간으로서의 윤리를 요구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CNN의 뉴스 앵커 앤더슨 쿠퍼다. 그는 지난 2010년 아이티 지진 참사 현장에서 생중계 중이었는데도 갑자기 카메라와 마이크를 내던지고 흙더미 속에 묻힌 소년을 구했다. 전 세계 시청자들이 감동했다. 만약 그가 소년을 버려둔 채 셔터만 눌렀다면 어땠을까. 물론 ‘아이를 구조하는 일은 구조대에 맡기고 기자는 그 장면을 보도하는 데 머물렀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른바 중립성의 원칙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국가 안위가 걸려 있거나 생명의 위협이 있을 때, 바로 쿠퍼 기자의 경우다.

사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케빈도 사진만 찍고 나서 현장을 훌쩍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에게 쏟아진 비난은 정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사진을 찍은 뒤 소녀를 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가 나중에 자살을 택한 것은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전쟁 트라우마와 지독한 가난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최근 종편 소속 기자가 정유라의 소재를 신고한 뒤 체포 사실을 단독 보도한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그녀를 체포하지 않는다 해도 타인의 생명이 위태로운 것도 아니었던 상황. 그러니 중립성의 원칙과 공정경쟁의 원칙을 위반했음은 명백하다 하겠다. ‘취재 활동 중에 취득한 정보는 보도의 목적에만 사용한다’는 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을 위반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언론의 취재 윤리 조항을 교조적으로 받들 필요는 없다’는 옹호론에 동조한다. 그것은 내가 특종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던 ‘구닥다리 기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특검과 헌재의 신속한 판단을 위한 결정적인 열쇠 역할을 기대할 수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적 가치를 저해하지 않는 선에서 보도윤리를 일부 절충하는 것은 타당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여하튼 이번 최순실 국정 농단과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기자들이 어느 정도 공로를 세운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다름 아니라 새해 벽두부터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늘어놓던 대통령 앞에 들러리(?)를 섰던 청와대 출입기자들 말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자리에 가서 대통령의 뻔한 거짓말에 한마디 반박도 하지 못할 바에는 무엇 하러 나갔나? 더군다나 기자에게는 ‘무기’와 다름없는 노트북과 녹음기 등을 빼앗긴 채였으니. 총도 들지 않고 전쟁터에 나간 꼴 아닌가. 아무래도 출입기자들이 순치(馴致))된 건 분명한 것 같다. 길들여졌다는 뜻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듣자 하니 박 대통령은 다가오는 설 이전에 기자간담회를 한 차례 더 계획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번만은 출입기자들이 단호히 거부해야 할 것이다. ‘하나 마나 한 소리’를 거듭해서 지겹게 들을 이유가 없다. 더 이상 병풍 노릇 하지 않기를 바란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내 친구 한 명은 나를 만날 때마다 “느그, 기자놈들이 문제여”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기자’(쓸 ‘記’, 놈 ‘者’)라는 단어에는 이미 ‘놈’ 자가 들어 있는데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놈’ 하나를 더 붙여 ‘기자놈’ ‘기자놈’ 하는 것이다. 청와대의 노트북 소지 금지 요청에 고분고분 말도 잘 들었던 기자들, 앞으로 또다시 그처럼 ‘순한 양’이 된다면― ‘기자놈’ 소리 백번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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