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쓰는 시’ - 김미은 여론매체부장
2024년 05월 02일(목) 00:00
아름다운 버드나무를 베어내고 운동장과 주차장을 조성하려는 공무원들 앞에서 그는 김수영의 시 ‘풀’을 낭독했다. 생태·환경 전문가들과 함께 샛강을 살려 물고기와 새들의 천국,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만들자 설득했다. 그가 지켜낸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은 30여년이 지난 지금, 천연기념물 황조롱이와 수달이 사는 도시민의 휴식처가 됐다.

‘한국 조경의 대모’로 불리는 정영선(83)을 만나는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는 아름다운 자연과 한 사람의 노력이 써내려간 한 편의 대서사시를 읽는 경험이었다. 사계절 변화에 따라 선유도 공원, 서울올림픽 조각공원, 국립중앙박물관 정원,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 경춘선 숲길 등 그의 작품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다보면 ‘사색의 정원’에 앉아 있는 기분도 들었다. 포항 바닷가 주택 정원을 조성할 때는 나희덕의 시 ‘여, 라는 말’이 떠올랐다는 대목을 기억했다 시인의 시를 찾아 읽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서울 아산병원. 주차장을 지하에 만들고 지상에 수많은 나무를 심어 작은 인공 숲을 조성한 이유는 환자와 보호자가 숨어 울 수 있는 곳, 지친 의사와 간호사가 쉬어갈 수 있는 위안의 장소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였다.

그의 조경관은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의 ‘검이불루화이불치(儉而不陋華而不侈)’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의 산천은 신이 내린 정원이자 천국”이라 생각하는 그는 아파트 난개발로 전통의 아름다움이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그래서 손자와 함께 구근을 심으며 미래세대에 물려줄 유산을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뭉클하다.

‘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영화에 흐르는 동요 ‘모두 다 꽃이야’처럼 영화를 보고 나면 소박한 꽃과 나무에 말을 건네고 숲길을 걷고 싶어진다. 공무원들이 이 영화를 꼭 봤으면 싶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조금이라도 변하려면 말이다.

마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정영선:이 땅에 숨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9월22일까지) 전시회도 열리고 있으니 관람해도 좋을 것같다.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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