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962년 춘추서림
2015년 10월 07일(수) 00:00 가가
일본 서적 보급 반세기
‘지적 허기’ 채우기 반백년
‘지적 허기’ 채우기 반백년
광주 예술의 거리를 수없이 오고 갔지만 그런 공간이 있는 줄은 몰랐다. 주말이면 골동품 시장이 열리곤 하는 중앙초등학교 담벼락 맞은 편 지하에 서점이 숨어 있었다. 일본어 서적을 비롯한 외국 서적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서점이다. ‘춘추 도서무역(주)’. 오랫동안 이곳을 이용한 이들에게는 ‘춘추서림’으로 불리는 곳이다.
지하 1층에 위치한 서점에 들어섰다. 눈에 띄는 건 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는 대형 화집(畵集). 일본 단행본 서적과 함께 각종 잡지, 학술지 등도 보인다. 손으로 일일이 작성한 낡은 고객 카드에 눈길이 간다. 박선홍 전 조선대학교 이사장, 고귀남 전 의원 등 낯익은 이름도 눈에 띤다.
정금렬(86) 대표가 ‘춘추서림’이라는 간판으로 영업을 시작한 건 지난 1962년 즈음이다. 그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께 부터 ‘외국간행물 취급소’에서 일하면서 ‘책’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외국 서적은 서울에서 허가를 받은 사람이 전국에 책을 보내는 식으로 판매됐다. 사무실이 별도로 있는 건 아니고, 보통 집에서 책을 받아 개인에게 배달하는 식이었다.
5·16 쿠데타가 터지고 얼마 후 주인이 말했다. “나는 법령집과 관보 등만 취급함세. 정군, 자네가 외국 간행물을 가지고 나가 따로 운영을 해보소.”
외국 간행물이라고는 하지만 당시는 대부분이 일본 서적이었다. 현 서점 자리에서 100m 쯤 떨어진 궁동 58번지, 가톨릭 센터 뒷편에 작은 가게를 열고 ‘춘추서림’을 열었다. 5층 짜리 건물을 새로 지어 현재의 자리로 옮겨온 건 지난 1988년이다.
“일제 강점기 때 교육 받으신 분들이 많아서 장사가 잘 됐어요. 교육감을 비롯해 교육청 국·과장과 장학사 등 교육계가 가장 큰 거래처였죠. 언론기관, 법원, 검찰 등도 큰 손님이었습니다. 기자님 계시는 신문사도 마찬가지였구요. 개인회사들도 많이 봤어요. 국내 서적에 비하면 고객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이윤이 참 좋았죠.”
한창 때는 일요일이 없었다. 전남 지역 시군 장학사들이 서점에 들러 간행물들을 둘러보고 필요한 책들을 사갔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또 전남경찰청과 광주경찰서 외사계에서 외설 서적이나 불온 서적을 취급하지 않는 지 정기적으로 살피러 오고는 했다.
미술대학 교수들, 초·중고 미술교사들도 단골손님이었다. 인기있는 책은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일본 대표 출판사 고단샤의 ‘그랜드 세계미술’전집이었다. 1976년 1쇄를 발행한 책으로 피카소 등 유명 작가의 그림을 컬러로 만날 수 있었다. 1970년대는 막 아파트가 들어설 때여서 전공자가 아닌 이들도 장식용으로 많이 구입했다고 한다.
‘대한화사전(大漢和 辭典)’도 많은 인기를 모았다. 한문 일어사전으로 지금도 꽂혀 있는 책 뒷편을 보니 소화 30년(1955년) 초판, 61년 수정 5판이 나온 책이다. 전집 가격이 당시 시세로 백만원이 훌쩍 넘어 많은 이들이 복사본 형태인 이른바 ‘영인본’을 구입했다. 예전엔 일본과 중국 서적의 영인본이 대량 판매돼 시장 자체를 흔들 정도가 됐고, 결국 판매가 완전 금지됐다.
기계 관련 잡지를 오랫동안 구입해온 화천기공과, ‘농경과 원예’ 등 농사 잡지를 구매해온 농촌진흥원과 농업기술원 오래된 단골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잡지인 월간 ‘문예춘추’는 가장 수요가 많은 잡지였다. 한창 때는 매달 100여권 넘게 팔렸고, 지금은 10여권 정도가 나간다.
고귀남 전 국회의원은 춘추서림의 오랜 단골이다. 1971년까지 전남매일신문사(광주일보 전신)에 다녔고, 이후 3선 의원을 지낸 그는 춘추서림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제가 국민학교 6학년 때 광복이 돼서 일본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죠. 신문사에 근무할 때 일본 신문을 통해 국제 관계와 세계 동향 등을 살펴볼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정당활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 잡지와 신문을 접하며 이웃나라 일본에 다해 잘 알 수 있었죠. ‘문예춘추’는 교양서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당시 일본어를 해독할 수 있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됐던 서점입니다. 지금까지도 계속 문을 열고 있는 게 참 고맙죠. 이런 공간 하나 있는 게 천만다행입니다.”
지금도 서점에 가끔 들르는 고 전의원은 오랫동안 구독했던 ‘문예춘추’ 대신 요즘에는 잡지 ‘세계’를 읽고 있다고 했다. 가톨릭 신자지만 서점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재가 불교’도 꾸준히 구독한다.
춘추서림 역시 요즘 오프라인 서점, 동네 서점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기본적으로 수요가 워낙 적은 시장이라 일반 서점에 비해 이중고를 겪고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교통이 불편해 광주에서 서울을 오가는 게 그리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죠. 인터넷 서점이 생기면서 또 한번 변화가 왔구요. 대학 도서관이나 공립도서관에 납품하는 수요도 많지 않아 고전중입니다. 큰 기관들에서 지역 업체들의 책을 우선적으로 구입해 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왜 일본 사람들 책을 파느냐고 안좋은 소리를 듣기도 했죠. 시작은 호구지책이었습니다.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연탄 구루마’라도 끄집어야할 상황이었으니까요. 왜 일본 간행물을 판매하기 시작했나 되돌아보면 묘한 운명이라고 밖에 생각이 안들어요. 국제 문화 교류와 지역문화 발전에 조금은 기여했을지도 모른다는 자긍심은 갖고 있습니다.”
정대표는 오래된 수첩을 꺼냈다. 부끄럽기는 하지만 ‘사훈’을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사훈은 ‘창조와 개혁, 근검과 성실, 신의와 봉사, 수입의 균점’이다. 한때 6명이었던 직원은 현재 4명으로 줄었고 16년전 입사한 한충렬 사장이 함께 살림을 꾸리고 있다. 현재 조선대 평생교육원 ‘시의 이해와 창작반’에서 공부하며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는 정대표는 지난 2007년 등단한 ‘늦깎이 시인’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시집을 펴낼 꿈도 갖고 있다.
본격적인 취재를 앞두고 미리 방문한 날, 건물에는 ‘임대’ 표시가 붙어 있었다. “아차” 싶었다. “경영난을 못견디고 사라지는구나. 취재할 필요가 없게 돼버렸네.”했다. 다행히 서점이 문을 닫지는 않는다. 현재의 지하 공간을 임대해 주고 규모를 약간 축소해 건물 1층으로 옮겨간다. 신간 등도 갖춰 소매 위주로 서점을 운영하고 각종 자료 등은 기증도 할 생각이다.
지하보다는 접근성이 좋아지는 셈이다. 일본과 관련된 독서모임, 저자 강좌 등 다양한 문화 행사들이 곁들여져 멋진 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면 좋겠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사진=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정금렬(86) 대표가 ‘춘추서림’이라는 간판으로 영업을 시작한 건 지난 1962년 즈음이다. 그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께 부터 ‘외국간행물 취급소’에서 일하면서 ‘책’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외국 서적은 서울에서 허가를 받은 사람이 전국에 책을 보내는 식으로 판매됐다. 사무실이 별도로 있는 건 아니고, 보통 집에서 책을 받아 개인에게 배달하는 식이었다.
5·16 쿠데타가 터지고 얼마 후 주인이 말했다. “나는 법령집과 관보 등만 취급함세. 정군, 자네가 외국 간행물을 가지고 나가 따로 운영을 해보소.”
한창 때는 일요일이 없었다. 전남 지역 시군 장학사들이 서점에 들러 간행물들을 둘러보고 필요한 책들을 사갔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또 전남경찰청과 광주경찰서 외사계에서 외설 서적이나 불온 서적을 취급하지 않는 지 정기적으로 살피러 오고는 했다.
미술대학 교수들, 초·중고 미술교사들도 단골손님이었다. 인기있는 책은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일본 대표 출판사 고단샤의 ‘그랜드 세계미술’전집이었다. 1976년 1쇄를 발행한 책으로 피카소 등 유명 작가의 그림을 컬러로 만날 수 있었다. 1970년대는 막 아파트가 들어설 때여서 전공자가 아닌 이들도 장식용으로 많이 구입했다고 한다.
‘대한화사전(大漢和 辭典)’도 많은 인기를 모았다. 한문 일어사전으로 지금도 꽂혀 있는 책 뒷편을 보니 소화 30년(1955년) 초판, 61년 수정 5판이 나온 책이다. 전집 가격이 당시 시세로 백만원이 훌쩍 넘어 많은 이들이 복사본 형태인 이른바 ‘영인본’을 구입했다. 예전엔 일본과 중국 서적의 영인본이 대량 판매돼 시장 자체를 흔들 정도가 됐고, 결국 판매가 완전 금지됐다.
기계 관련 잡지를 오랫동안 구입해온 화천기공과, ‘농경과 원예’ 등 농사 잡지를 구매해온 농촌진흥원과 농업기술원 오래된 단골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잡지인 월간 ‘문예춘추’는 가장 수요가 많은 잡지였다. 한창 때는 매달 100여권 넘게 팔렸고, 지금은 10여권 정도가 나간다.
고귀남 전 국회의원은 춘추서림의 오랜 단골이다. 1971년까지 전남매일신문사(광주일보 전신)에 다녔고, 이후 3선 의원을 지낸 그는 춘추서림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제가 국민학교 6학년 때 광복이 돼서 일본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죠. 신문사에 근무할 때 일본 신문을 통해 국제 관계와 세계 동향 등을 살펴볼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정당활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 잡지와 신문을 접하며 이웃나라 일본에 다해 잘 알 수 있었죠. ‘문예춘추’는 교양서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당시 일본어를 해독할 수 있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됐던 서점입니다. 지금까지도 계속 문을 열고 있는 게 참 고맙죠. 이런 공간 하나 있는 게 천만다행입니다.”
지금도 서점에 가끔 들르는 고 전의원은 오랫동안 구독했던 ‘문예춘추’ 대신 요즘에는 잡지 ‘세계’를 읽고 있다고 했다. 가톨릭 신자지만 서점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재가 불교’도 꾸준히 구독한다.
춘추서림 역시 요즘 오프라인 서점, 동네 서점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기본적으로 수요가 워낙 적은 시장이라 일반 서점에 비해 이중고를 겪고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교통이 불편해 광주에서 서울을 오가는 게 그리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죠. 인터넷 서점이 생기면서 또 한번 변화가 왔구요. 대학 도서관이나 공립도서관에 납품하는 수요도 많지 않아 고전중입니다. 큰 기관들에서 지역 업체들의 책을 우선적으로 구입해 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왜 일본 사람들 책을 파느냐고 안좋은 소리를 듣기도 했죠. 시작은 호구지책이었습니다.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연탄 구루마’라도 끄집어야할 상황이었으니까요. 왜 일본 간행물을 판매하기 시작했나 되돌아보면 묘한 운명이라고 밖에 생각이 안들어요. 국제 문화 교류와 지역문화 발전에 조금은 기여했을지도 모른다는 자긍심은 갖고 있습니다.”
정대표는 오래된 수첩을 꺼냈다. 부끄럽기는 하지만 ‘사훈’을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사훈은 ‘창조와 개혁, 근검과 성실, 신의와 봉사, 수입의 균점’이다. 한때 6명이었던 직원은 현재 4명으로 줄었고 16년전 입사한 한충렬 사장이 함께 살림을 꾸리고 있다. 현재 조선대 평생교육원 ‘시의 이해와 창작반’에서 공부하며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는 정대표는 지난 2007년 등단한 ‘늦깎이 시인’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시집을 펴낼 꿈도 갖고 있다.
본격적인 취재를 앞두고 미리 방문한 날, 건물에는 ‘임대’ 표시가 붙어 있었다. “아차” 싶었다. “경영난을 못견디고 사라지는구나. 취재할 필요가 없게 돼버렸네.”했다. 다행히 서점이 문을 닫지는 않는다. 현재의 지하 공간을 임대해 주고 규모를 약간 축소해 건물 1층으로 옮겨간다. 신간 등도 갖춰 소매 위주로 서점을 운영하고 각종 자료 등은 기증도 할 생각이다.
지하보다는 접근성이 좋아지는 셈이다. 일본과 관련된 독서모임, 저자 강좌 등 다양한 문화 행사들이 곁들여져 멋진 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면 좋겠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사진=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