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패션하우스] 월남치마에서 미스코리아 의상까지 … 50년 광주 양장 역사
2015년 05월 20일(수) 00:00 가가
〈8〉 충장로 도미패션하우스
곡성에 살던 중학생 소녀는 옷을 곧잘 만들었다.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가 운영하던 가게에서 자연스레 바느질을 배웠다. 칼라를 빳빳이 세운 교복을 만들어 입었고, 광목으로 여름 하복도 깔끔하게 지어 입었다.
도미패션하우스(이하 도미) 정옥순(73) 대표에게는 십대 후반 광주의 양재학원에서 처음 만들었던 일명 ‘베비옷’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다. 50년 넘는 그녀의 본격적인 ‘양장 인생’이 거기서부터 시작되서다. 지금 지하 작업실에는 당시 베비옷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 액자에 담겨 놓여 있다.
한 때 대한민국 여성들은 모두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 하지만 1980년대 기성복이 등장하면서 양장점이 하나둘 자취를 감췄고 광주 멋쟁이들의 기를 팍팍 살려줬던 충장로 일대 오래된 양장점들 역시 간판을 내리거나 서울로 옮겨갔다. 예전의 호황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지금은 젊은 감각으로 무장한 디자이너들이 광주 패션계를 지키고 있다.
광주에 양장점이 등장한 건 1955년으로 알려져 있다. 충장로 2가에 이진모씨가 문을 연 ‘모나미 양장점’이 시초였다. 이어 1957년 이철우씨가 문을 연 남성양장점이 뒤를 잇는다. 이 씨는 서울로 진출, ‘마담포라’ 브랜드를 론칭했다. 광주패션협회장을 역임하고 ‘도투말’이라는 상호로 잘 알려진 박재원씨 역시 지난 2004년 서울로 진출했다. 가든백화점 자리에 위치했던 미모사양장점도 유명했다. 호남대학교를 설립한 이화성씨가 운영했던 곳이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사업을 접고, 광주를 떠났지만 정 대표는 지금도 매일 디자인을 하고, 패턴을 뜨는 ‘현역’으로 활동중이다.
함경북도 해령 출신이었던 어머니께 야무진 솜씨를 물려받은 그녀는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광주로 올라와 광주경찰서(현 동부경찰서) 옆 양재학원(중앙학원으로 기억)에 다녔다. 첫날의 사건을 잊을 수가 없다.
“곡성 촌년이 광주에 올라와서 이런 저런 경험 많이 했죠. 수업이 끝나고 학원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밤 12시에 사이렌이 울리는 거예요. 너무 놀라서 몸을 달달달 떨었죠. 당시는 경찰서에서 밤 12시면 사이렌을 울렸는데 그걸 몰랐던 거죠. 이 학원에서 센티미터로 작업하는 걸 배웠는데 인치로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당시 인기가 많았던 노라노양재학원으로 옮겼어요. 내가 수강생중 굉장히 어렸는데 실력이 괜찮았나봐요. 야간반 학생들을 가르치라고 하더라구요. 거기서 가르치던 사람과 함께 옷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양장을 시작했죠.”
당시 테일러양장점을 인수해 양장점을 운영하던 정 대표는 1963년 즈음 현재의 도미 옆자리에 ‘도미양장’을 오픈했다. 도미(都美)는 ‘도시를 아름답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현재의 4층짜리 도미패션하우스 건물은 지난 1980년 신축한 건물이다. 도미양장 바로 옆집을 매입해 건물을 올렸다.
1970년대는 그야말로 의상실의 전성기였다. 남성양장점, 모나미, 미모사, 도투말 등 여러 가게 대표들의 모임도 활발했다. 어린 축에 속한 정 대표도 열심히 참여해 선배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듣고는 했다. 박재원·이화성씨는 당시나 지금이나 그녀가 존경하는 선배다.
한창 때는 정말 바빴다.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밤 11시에 문을 닫았다. 명절 이외에는 쉬는 날도 없었다. 고생도 많았다.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정 대표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당시에는 국민학교만 마치고 일을 배우러 오는 사람도 많았어요. 일을 많이 할 때는 미싱사 3팀, 패턴사, 매장 담당까지 직원이 15명에 달하기도 했죠. 당시에는 옷을 한 가지만 맞추는 게 아니라 블라우스부터 바지, 재킷까지 세트로 하는 경우가 많아 그만큼 일감도 많았죠.”
정 대표는 한 번 맺은 인연을 쉬 놓치 않는다. 현재 공장장은 이십대 때 도미에 들어와 환갑을 넘겼다. 매장에서 오랫동안 참 일을 잘했던 직원은 동서가 됐다.
“초창기에 가장 많이 팔았던 게 일명 월남치마였어요. 당시 포플린과 다우다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는 게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거든요. 입고 나가면 노인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그랬죠. 나팔 바지와 미니스커트 역시 웬만한 사람들은 다 입었구요. 당시 멜빵을 멘 나팔 바지도 유행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했던 게 상의를 거의 입지 않고 멜빵으로만 가리고는 했죠. 어찌보면 지금보다 더 파격이었던 것 같아요. 신문에 실릴 예전 사진을 찾다 보니 유행은 돌고 돈다는 생각이 드네요. 치마 길이가 길어지고 1980년대 유행했던 스타일이 다시 각광받고 있는 걸 보면요.”
한창 때 800개가 넘던 의상실은 1980년대 대기업이 패션업으로 진출하면서 하강기를 맞게 된다.
“남성양장점이 서울로 옮기면서 우리를 다 부른 적이 있어요. 최경자 복장학원을 방문했는데 기성복 패턴을 해야할 시점이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 맞았던 게 맞춤옷 시장이 힘들어지면서 의상실을 했던 사람 중에 기성복을 가져다 파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그랬죠. 난 한번도 그래 본 적이 없어요. 옷을 더 열심히 만들어서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옷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행사에도 참여했다. 지금은 개인 패션쇼 행사를 접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개인 패션쇼가 빈번하게 열렸다. 광주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하고 함평나비축제 등에도 참여했다. 미스전남 선발대회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 행사다. 예나 지금이나 화려한 색감의 의상을 주로 제작하는 그녀에게는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또 대회가 시작되기전 진행된 패션쇼에서 탤런트 이효춘, 가수 장은숙 등이 그녀의 옷을 입고 미를 뽐냈다. 의상을 제작하느라 매번 너무 힘들었지만 그만큼 희열도 느꼈다.
정 대표에게는 무엇보다 맏딸 장소영(46)씨가 든든한 후원군이다. 정 대표는 소영씨가 고등학교 때부터 동대문 원단시장에 데리고 다녔다. 밤 10시 기차를 타고 새벽에 서울에 도착하면 그 때부터 시장 안을 돌아다니며 원단과 부자재 등을 구입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의상을 전공한 소영씨는 오랫동안 도미 디자인 실장으로 있으며 강의를 해오다 올해 호남대 의상학과 교수로 정식 임용됐다.
“일본 관련 프로그램을 보면 가업을 잇는 경우가 많잖아요. 1대, 2대, 3대 이어가는 게 정말 좋아보이더군요. 다행히 소영이가 제 일을 잇게 돼 너무 행복하죠. 태어나면서부터 엄마가 옷만드는 것을 봐온 셈이예요. 도미와 함께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디자인을 같이 할 때면 소영이의 요즘 감각과 나의 옛날 노하우가 잘 맞는 것같아요. 다양한 패션 정보도 알려주죠.”
가게 중앙에 걸려 있는 독특한 의상은 낡은 넥타이를 활용해 만든 작품으로 소영씨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전 일하는 게 갈수록 재미있어요. 할수록 어려워 도전 의식도 생깁니다. 계속 똑같은 옷을 만들면 내 스스로가 지루해서 못견디겠어요. 나이 먹고 오래 된 사람이 초라하게 옛날 옷 걸어두고 있는 게 난 싫더라구요. 언젠가 오랜 단골 손님에게 이 나이 먹고 일하는 게 좀 그렇지 않냐고 했더니 이 일이 좋아서 하는 것 같은데 아마 그만 두면 다음날 치매 걸릴거라고 하더군요.”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이유를 ‘재미’라고 말하는 정 대표는 행복해 보였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사진=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도미패션하우스(이하 도미) 정옥순(73) 대표에게는 십대 후반 광주의 양재학원에서 처음 만들었던 일명 ‘베비옷’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다. 50년 넘는 그녀의 본격적인 ‘양장 인생’이 거기서부터 시작되서다. 지금 지하 작업실에는 당시 베비옷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 액자에 담겨 놓여 있다.
함경북도 해령 출신이었던 어머니께 야무진 솜씨를 물려받은 그녀는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광주로 올라와 광주경찰서(현 동부경찰서) 옆 양재학원(중앙학원으로 기억)에 다녔다. 첫날의 사건을 잊을 수가 없다.
“곡성 촌년이 광주에 올라와서 이런 저런 경험 많이 했죠. 수업이 끝나고 학원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밤 12시에 사이렌이 울리는 거예요. 너무 놀라서 몸을 달달달 떨었죠. 당시는 경찰서에서 밤 12시면 사이렌을 울렸는데 그걸 몰랐던 거죠. 이 학원에서 센티미터로 작업하는 걸 배웠는데 인치로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당시 인기가 많았던 노라노양재학원으로 옮겼어요. 내가 수강생중 굉장히 어렸는데 실력이 괜찮았나봐요. 야간반 학생들을 가르치라고 하더라구요. 거기서 가르치던 사람과 함께 옷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양장을 시작했죠.”
당시 테일러양장점을 인수해 양장점을 운영하던 정 대표는 1963년 즈음 현재의 도미 옆자리에 ‘도미양장’을 오픈했다. 도미(都美)는 ‘도시를 아름답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현재의 4층짜리 도미패션하우스 건물은 지난 1980년 신축한 건물이다. 도미양장 바로 옆집을 매입해 건물을 올렸다.
1970년대는 그야말로 의상실의 전성기였다. 남성양장점, 모나미, 미모사, 도투말 등 여러 가게 대표들의 모임도 활발했다. 어린 축에 속한 정 대표도 열심히 참여해 선배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듣고는 했다. 박재원·이화성씨는 당시나 지금이나 그녀가 존경하는 선배다.
한창 때는 정말 바빴다.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밤 11시에 문을 닫았다. 명절 이외에는 쉬는 날도 없었다. 고생도 많았다.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정 대표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당시에는 국민학교만 마치고 일을 배우러 오는 사람도 많았어요. 일을 많이 할 때는 미싱사 3팀, 패턴사, 매장 담당까지 직원이 15명에 달하기도 했죠. 당시에는 옷을 한 가지만 맞추는 게 아니라 블라우스부터 바지, 재킷까지 세트로 하는 경우가 많아 그만큼 일감도 많았죠.”
정 대표는 한 번 맺은 인연을 쉬 놓치 않는다. 현재 공장장은 이십대 때 도미에 들어와 환갑을 넘겼다. 매장에서 오랫동안 참 일을 잘했던 직원은 동서가 됐다.
“초창기에 가장 많이 팔았던 게 일명 월남치마였어요. 당시 포플린과 다우다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는 게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거든요. 입고 나가면 노인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그랬죠. 나팔 바지와 미니스커트 역시 웬만한 사람들은 다 입었구요. 당시 멜빵을 멘 나팔 바지도 유행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했던 게 상의를 거의 입지 않고 멜빵으로만 가리고는 했죠. 어찌보면 지금보다 더 파격이었던 것 같아요. 신문에 실릴 예전 사진을 찾다 보니 유행은 돌고 돈다는 생각이 드네요. 치마 길이가 길어지고 1980년대 유행했던 스타일이 다시 각광받고 있는 걸 보면요.”
한창 때 800개가 넘던 의상실은 1980년대 대기업이 패션업으로 진출하면서 하강기를 맞게 된다.
“남성양장점이 서울로 옮기면서 우리를 다 부른 적이 있어요. 최경자 복장학원을 방문했는데 기성복 패턴을 해야할 시점이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 맞았던 게 맞춤옷 시장이 힘들어지면서 의상실을 했던 사람 중에 기성복을 가져다 파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그랬죠. 난 한번도 그래 본 적이 없어요. 옷을 더 열심히 만들어서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옷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행사에도 참여했다. 지금은 개인 패션쇼 행사를 접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개인 패션쇼가 빈번하게 열렸다. 광주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하고 함평나비축제 등에도 참여했다. 미스전남 선발대회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 행사다. 예나 지금이나 화려한 색감의 의상을 주로 제작하는 그녀에게는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또 대회가 시작되기전 진행된 패션쇼에서 탤런트 이효춘, 가수 장은숙 등이 그녀의 옷을 입고 미를 뽐냈다. 의상을 제작하느라 매번 너무 힘들었지만 그만큼 희열도 느꼈다.
정 대표에게는 무엇보다 맏딸 장소영(46)씨가 든든한 후원군이다. 정 대표는 소영씨가 고등학교 때부터 동대문 원단시장에 데리고 다녔다. 밤 10시 기차를 타고 새벽에 서울에 도착하면 그 때부터 시장 안을 돌아다니며 원단과 부자재 등을 구입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의상을 전공한 소영씨는 오랫동안 도미 디자인 실장으로 있으며 강의를 해오다 올해 호남대 의상학과 교수로 정식 임용됐다.
“일본 관련 프로그램을 보면 가업을 잇는 경우가 많잖아요. 1대, 2대, 3대 이어가는 게 정말 좋아보이더군요. 다행히 소영이가 제 일을 잇게 돼 너무 행복하죠. 태어나면서부터 엄마가 옷만드는 것을 봐온 셈이예요. 도미와 함께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디자인을 같이 할 때면 소영이의 요즘 감각과 나의 옛날 노하우가 잘 맞는 것같아요. 다양한 패션 정보도 알려주죠.”
가게 중앙에 걸려 있는 독특한 의상은 낡은 넥타이를 활용해 만든 작품으로 소영씨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전 일하는 게 갈수록 재미있어요. 할수록 어려워 도전 의식도 생깁니다. 계속 똑같은 옷을 만들면 내 스스로가 지루해서 못견디겠어요. 나이 먹고 오래 된 사람이 초라하게 옛날 옷 걸어두고 있는 게 난 싫더라구요. 언젠가 오랜 단골 손님에게 이 나이 먹고 일하는 게 좀 그렇지 않냐고 했더니 이 일이 좋아서 하는 것 같은데 아마 그만 두면 다음날 치매 걸릴거라고 하더군요.”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이유를 ‘재미’라고 말하는 정 대표는 행복해 보였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사진=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