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의 창’] ‘사료’ 없는 ‘생각’ 역사학
2023년 10월 18일(수) 22:00 가가
필자가 대학원에서 강의할 때 가장 강조하는 것은 역사학은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는 학문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을 사료로 ‘증명’하는 학문이라는 점이다. 이 점이 역사학이 갖고 있는 장점이자 단점이다. 한국 역사학계를 장악한 강단 사학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자신의 ‘생각’으로 ‘사료’를 조작하거나 없는 ‘사료’를 있는 것처럼 속인다. 자칭 ‘실증 사학’이지만 ‘실증’은 없다.
강단 사학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연대는 서기 369년이다. 야마토왜(大和倭)가 가야를 점령하고 이른바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해이기 때문이다. 강단 사학의 스피커로 전락한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은 2019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가야본성(加耶本性)’이라는 이름의 가야 전시회를 개최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아놓은 가야 유물들은 훌륭했다. 문제는 벽면에 써놓은 연표와 설명문이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작성했다면 명실이 상부했다는 점이다. 그 연표는 369년에 이런 사건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 “가야 7국(비사벌,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백제·왜 연합의 공격을 받음(서기)”
‘서기’는 720년에 편찬한 ‘일본서기’를 뜻하는데 관람객들이 “웬 일본서기?” 라는 의문을 제기할까봐 ‘서기’라고 축약해 관람객들을 호도한 것이다. ‘일본서기’를 ‘서기’로 축약했으니 ‘삼국사기’는 ‘사기’, ‘삼국유사’는 ‘유사’, ‘동국여지승람’은 ‘승람’이라고 축약했다. 삼국사기를 삼국사기라고 쓰지 못하고 ‘사기’라고 축약하고 삼국유사를 삼국유사라고 쓰지 못하고 ‘유사’라고 축약했다. 애비를 애비라고 부르지 못하는 서자 홍길동인가.
이 연표는 ‘일본서기’ 신공(神功) 49년에 야마토왜군이 “신라를 공격해서 깨트리고, 이로 인해 비자발·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 7국을 평정했다”고 나오는 기사를 옮겨놓은 것이다. 야마토왜가 공격한 곳은 신라인데 점령한 곳은 가야라는 희한한 결과를 적어 놓았다. 만약 유럽사에서 ‘프랑스를 공격해서 독일을 점령했다’라고 서술한 역사서가 있다면 즉시 폐기처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신병적 논리가 통할뿐만 아니라 이른바 ‘정설’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 한국 역사학계와 일본 극우파 역사학계이다.
문제는 ‘일본서기’ 신공 49년은 서기로 249년이지 369년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한국 역사학계와 일본 극우파 역사학계는 120년을 더해서 369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바꾸려면 사료적 근거를 대야한다. 그러나 그런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유일한 근거이다.
더욱이 ‘일본서기’가 연대가 맞지 않는 역사서이긴 하지만 최소한 신공왕후 때의 사건에 대해서는 연대를 정확하게 써 놓았다는 점이다. 일본서기 ‘신공 43년조’는 “‘위지(魏志)’에서 말하기를 정시(正始) 4년에 왜왕이 다시 사신을 보냈다”라고 썼다. 정시는 조조(曹操)가 세운 위(魏)의 3대 임금 조방(曹芳:재위 239~254)의 연호로서 서기 240년부터 249년까지 사용했는데 정시 4년은 서기 243년이다. 일본서기는 신공 43년, 곧 서기 243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냈다고 썼다.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 ‘신공기’는 신공 39년(239년), 신공 40년(240년)에 왜와 위가 교류했다고 연대를 정확하게 써 놓았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은 신공 49년은 서기 249년이라고 정확하게 써 놓은 것이다.
그런데 그 1300여년 후에 한국 역사학자 전부와 일본 극우파 역사학자들은 제멋대로 120년을 더해서 369년이라고 우긴다. 유일한 근거는 자신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밖에 없다. 인류에 역사학이 생긴 이후 이런 역사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생각’ 역사학을 비판하면 ‘사이비 역사학’이니 ‘유사 역사학’이니 딱지를 붙여 제거하려 한다. 실증 없는 실증 사학의 비극이다. 더 큰 비극은 이런 ‘생각’ 역사학이 한국 역사학계의 주류라는 점이다. 세계 10위권 국가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
문제는 ‘일본서기’ 신공 49년은 서기로 249년이지 369년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한국 역사학계와 일본 극우파 역사학계는 120년을 더해서 369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바꾸려면 사료적 근거를 대야한다. 그러나 그런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유일한 근거이다.
더욱이 ‘일본서기’가 연대가 맞지 않는 역사서이긴 하지만 최소한 신공왕후 때의 사건에 대해서는 연대를 정확하게 써 놓았다는 점이다. 일본서기 ‘신공 43년조’는 “‘위지(魏志)’에서 말하기를 정시(正始) 4년에 왜왕이 다시 사신을 보냈다”라고 썼다. 정시는 조조(曹操)가 세운 위(魏)의 3대 임금 조방(曹芳:재위 239~254)의 연호로서 서기 240년부터 249년까지 사용했는데 정시 4년은 서기 243년이다. 일본서기는 신공 43년, 곧 서기 243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냈다고 썼다.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 ‘신공기’는 신공 39년(239년), 신공 40년(240년)에 왜와 위가 교류했다고 연대를 정확하게 써 놓았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은 신공 49년은 서기 249년이라고 정확하게 써 놓은 것이다.
그런데 그 1300여년 후에 한국 역사학자 전부와 일본 극우파 역사학자들은 제멋대로 120년을 더해서 369년이라고 우긴다. 유일한 근거는 자신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밖에 없다. 인류에 역사학이 생긴 이후 이런 역사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생각’ 역사학을 비판하면 ‘사이비 역사학’이니 ‘유사 역사학’이니 딱지를 붙여 제거하려 한다. 실증 없는 실증 사학의 비극이다. 더 큰 비극은 이런 ‘생각’ 역사학이 한국 역사학계의 주류라는 점이다. 세계 10위권 국가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