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청바지를 입는 이유- 김향남 수필가
2023년 09월 24일(일) 22:00
지구촌에서 인종과 민족을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옷이 있다. 처음엔 광부들의 작업복으로 출발했으나 끊임없는 변화를 모색하며 패션으로 거듭난 옷이다. 영화배우 제임스 딘과 로큰롤의 황태자 엘비스 프레슬리,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와 페이스북의 창시자 마크 저크버그 등의 유명인들도 즐겨 입는다. 덕분에 젊음과 자유, 반항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고, IT 패션의 대명사로 꼽히기도 했다.

그렇다. 바로 청바지 이야기다. 청바지가 세상에 등장한 지는 무려 170년이나 되지만, 그 인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우리 중의 누구도 청바지 한 번 안 입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번 입어봤다고 안 입는 것이 아니라, 입고 또 입고 사고 또 산다. 도대체 그 뻣뻣하고 질긴 청색의 바지 하나가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는 것일까.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 것일까.

다 알다시피 청바지는 그 탄생부터가 매우 기발했다. 청바지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미국의 천막 천 생산업자였던 리바이 스트라우스라고 한다. 1850년 미국 서부는 황금을 캐려고 몰려드는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었고, 전 지역이 천막촌으로 변해가는 시기였다. 리바이 스트라우스의 천막 천 생산도 호황기를 맞았다. 그런데 잘 나가던 사업이 갑자기 꽉 막히게 되고, 그는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 어느 날 홧김에 술을 마시다가 우연히 천막 속에 광부들이 모여 앉아 바지를 꿰매는 모습을 보게 된다. 무심코 지켜보던 그 순간 그는 유레카를 외친다. 맞아! 이거야. 바로 천막 천으로 바지를 만들겠다는 기발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고 시장에 첫선을 보인 제품은 큰 인기를 얻었다. 하마터면 폐기 처분될 뻔한 재고품들이 변신의 날개를 달게 된 순간이었다.

엊그제는 오랜만에 1박 2일 모임을 다녀왔다. 모여서 공부도 하고 회포도 풀고, 세미나도 하고 재미나게 즐겼다. 거기 참석자 중에 C 선생님이라고 연세가 좀 있으신데, 그분도 손수 세 시간을 운전하고 오셨다. 그것만도 대단하다 싶은데, 다음날엔 엄지 척을 해야 할 만큼 상큼 발랄한 일이 벌어졌다. 왜냐구, 짐작하겠지만 바로 그분의 의상 때문이었다. 어제 세미나 때 입었던 것과는 확실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중절모에 티셔츠와 찢어진 청바지. 우선 복장이 너무나 자유롭고 유쾌해 보였다. 누구도 팔순의 노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젊은이 못지않은 차림새가 작고 다부진 그분의 체구와도 잘 어울렸다.

그분은 별로 지치거나 지루한 기색도 없이 이틀간의 일정을 거뜬히 소화하고 사뿐히 오던 길로 되돌아가셨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니라는 것을 ‘찢청’으로 증명해주신 거다. 물론 그분의 ‘찢청’은 허벅지나 무릎이 훤히 드러나거나 실밥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과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소심하다 싶게 절제되어 있었다고 할까. 찢어진 자리를 감침질로 막음해 놓은 솜씨에는, 자유는 누리되 방종은 금물이라는 뜻이 새겨져 있는 듯도 했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대충 입지 뭐, 하고 입는 옷이 청바지이기도 하고, 멋 좀 내볼까? 아니 좀 젊어져 볼까? 작정하고 입는 옷이 청바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장 흔하게 입는 것이 청바지인데 어떤 때는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 않다가도 어떤 순간엔 아주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이 청바지이다.

그러고 보면 청바지는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특별한 옷,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세련된 옷, 가장 보편적이지만 가장 고유한 옷이지 싶다. 모두가 다 입는 동질성의 옷이기도 하고 극히 내밀한 개별성의 옷이기도 하다.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저항과 거부 혹은 불안과 유혹을 불러오기도 하는 이율배반의 의상이기도 하다.

그날 그분의 청바지도 그런 것 같았다. 이를테면 격식을 지키면서도 격식을 깨트리는 파격의 자유, 같으면서도 다름을 추구하는 자기만의 멋을 청바지라는 장(場)을 통해 유감없이 발휘해 낸 게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세대를 불문하고 청바지는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융통성과 창의성, 새로움의 미학을 추구하며 ‘자기다움’의 개성을 구현할 수 있는 물 같고 바람 같은 옷.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기꺼이 청바지를 입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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