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살구 - 김향남 수필가
2023년 07월 03일(월) 00:00
어릴 적 먹은 살구는 시큼털털했었다. 한 입 베어 물었다가 이내 뱉어 버린 기억이 생생하다. 꽃보다 열매에 매달렸던 시절이었으니만큼 꽃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우리의 놀이터는 열매를 매달고 있는 나무 밑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살구에 대해서는 유독 시큼했던 기억이 거의 전부다. 그때 먹은 것은 개살구였거나 아직 채 무르익기 전이었는지 썩 내키는 맛은 아니었다. 도시의 마켓에서 살구를 만났을 때, 반갑기는 하면서도 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특별히 신맛이 땅기거나 빛깔에 이끌린 경우라면 몰라도 선뜻 집어 드는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살구는 따스하고 아련한 고향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그것은 살구가 특별하거나 흔해서라기보다, 오래전부터 불려온 노랫말로 인해서거나 교과서를 통해 배운 시구절의 영향이 컸을 듯싶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마치 엄마 뱃속에서부터 저절로 알고 나온 것처럼 익숙한 노래다. 이 노래가 지어진 것은 1927년 무렵이라고 하니 벌써 100년이 다 됐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라고 시작되는 시조 역시 1950년대에 발표된 것이고 보면, 살구는 알게 모르게 삶의 애환과 그리움을 달래 주며 고향의 원형처럼 인식되지 않았을까.

꽃만 보아서는 벚꽃인지 살구꽃인지 헷갈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살구는 ‘고향 까마귀’라도 본 듯 반색을 하게 했다. 10여 년 전 튀르키예를 여행했을 때, 식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과일이 있었다. 꽃은 잘 몰라도 열매는 훤한지라 왈칵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조심조심 깨물어 보았다. 여차하면 뱉어낼 요량으로. 그런데 웬걸! 너무 단단하지도 않고 너무 무르지도 않은, 너무 시지도 않고 너무 달지도 않은 게 자꾸 입맛을 당겼다. 크기도 맛도 쏙 들어온 그것의 이름은 설마 살구일까 싶었으나 정말로 살구였다. 먼 나라에 여행 와서 뜬금없이 해후한 고향의 과일이 마침내 변신에 성공한 것일까? 고향에서보다 더 실하고 더 맛깔스러운 데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 곳마다 풍성하기도 한 그 열매를 거르지 않고 먹었다. 자르고 깎을 필요도 없이 간편하고 단순한, 반으로 갈려진 도톰한 살집을 사근사근 씹어 보는 순간은 유년의 나무 밑에서보다 더 달뜨고 짜릿했다. 바깥의 새콤과 안의 달콤이 섞이어 내는 융화의 맛이랄까, 혹은 발견의 기쁨이라고 할까.

이후 유난히 살구를 탐하게 되었다. 처음엔 맛이 어떨지 몰라 망설이며 샀다가 사고 또 샀다. 살구도 일취월장 변화를 도모한 것일까? 아니면 ‘시큼’을 ‘상큼’으로 느끼는 내 미뢰의 착각일까. 유년의 기억과는 확연히 다른 맛에 혹시나 무엇에 홀린 것은 아닌지 의심도 들었다. 가령 살구의 몸속에는 나무 아래 입을 벌리고 서 있는 걸신이 들렸는지도 모른다거나, 노랑만도 아니고 빨강은 더욱 아닌 고아 우미한 살빛에 양귀비 뺨치는 재색을 겸비해 놓았다거나, 아니면 형용하기 어려운 은미한 매력에 어쩔 수 없이 빨려들게 되거나….

며칠 전 문득 살구나무를 만났다. 노란 열매들을 방울처럼 매단, 언제 꽃피고 언제 열매 맺고 언제 익었는지 모르겠는, 염치 불고 반가운 나무였다. 하지만 어쩌면 나무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씨알도 굵고 때깔도 고운 놈들이 벌써 풀밭을 뒹굴고 있는 것이라니. 주섬주섬 주머니에 모셔두고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기특하고 어여쁜 것들이 올망졸망하였다.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서슴없이 후두둑 툭 툭 열매를 떨구었다. 미련 없이 가뿐한, 굵고 짧은, 단단하고 묵직한 낙하였다.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툭, 직진으로 투항해 버리는 전사의 최후 아니 최후의 전사였다. 그 깔끔한 종결을 대지는 부드럽게 받아 안았다.

몇 번 더 나무 밑을 서성였다. 다행인지 어쩐지 우리 동네 사람들은 참 욕심이 없다. 황금알이 바닥을 구르는데도 탐내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사 먹는 것도 맛있지만 나무 아래서 주운 놈은 더 맛있는데 말이다. 덕분에 독차지하는 복락까지 한꺼번에 누리느라 아주 행복해 미치겠다.

살구는 보관이 어려운 만큼 시기를 놓치면 먹기 어려운 과일이다. 물론 말리거나 졸여서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지만, 그건 살구의 본맛에서 멀어진 것일 수밖에 없다. 살구는 원형 그대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탱글탱글한 맵시와 아늑한 살빛과 새콤달콤한 맛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채, 한 며칠 짧은 축복을 누려 보는 것이다. 살굿빛처럼 그윽해져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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