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격정이 휘몰아칠 때-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3년 04월 22일(토) 21:00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온다. 나무들이 흔들거리더니 세찬 회오리바람이 몰아치자 큰 나무도 휘청인다. 우르릉 쿵쾅! 천둥과 함께 번개가 하늘을 쩍쩍 가른다. 거친 파도가 나룻배를 덮친다. 까마득한 나락으로 곤두박질했던 조각배는 어느새 파도 꼭대기에 아스라이 서 있다.

우리 마음 바다도 가끔 눈보라가 치고 태풍이 분다. 때론 열정이 때론 분노가, 때론 격노와 평온이 수없이 갈마든다.

겉으로 보이는 내가 전부 내가 아니다. 나조차 내 안에 누가 있는지 모르고 뒤늦게야 알 수 없는 또 다른 내가 살고 있음을 안다. 불쑥 터를 잡고 앉은 불청객. 녀석은 심술도 사납다. 심호흡을 해 본다. 맞서 싸워도 보고 녀석 투정을 토닥여도 본다.

살다 보니 평탄한 오솔길만 나오는 게 아니란 걸 모른바 아니다. 세상 별의별 사람들과 섞이다 보면 화도 나고 분노가 치민다. 미련이 남고 슬픔에 빠지고 그렇게 내 안의 수많은 격정과 마주해야 한다. 그때마다 녀석은 더욱 거칠어진다. 그 광기에 맞서서 싸울 나를 다독이는 일은 더없이 힘이 들고 고달프다. 삶은 꽃길만 아닌 거라고, 맞서 싸우는 나에게 힘을 보탠다.

속에는 때론 나 아닌 수천 명의 누군가가 살고 있어서, 여럿이 나를 흔들고 비틀고 내동댕이치기도 한다. 내가 피를 철철 흘리고 쓰러질 때까지 그들은 집요하게 나를 후비고 파고 찍는다. 그렇게 격정이 휘몰아치면 난 잠시 일상을 멈춘다. 그리고 길을 나선다.

넉넉하게 서너 시간 남짓 걷는다. 거기 고요한 산속 오두막 하나. 나 홀로 찾는, 마음 구석 은밀한 내 안의 쉼터, 그곳으로 걸어가는 동안 내 격정은 순해지고 맑아진다. 거기 평온 고요에 몸을 기대면 녀석들은 하나둘 떠나고, 찢긴 상처들도 차츰차츰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냉정이 지나치거나 격노하면 자칫 화를 당하기 쉽다. 그래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뜨뜻미지근하게 오늘을 산다. 그렇게 일부러 나를 달관에 이르게 해서 새롭게 나를 만든다.

관계란 모두 내가 중심일 수는 없다. 어차피 얽히고설키는 것이 본질, 거미줄보다 더 촘촘한 관계들, 이 순간조차 수없이 인연의 줄을 뽑아 내고 있는 지금, 일부러 한 발 떨어져 관계를 바라본다.

그러면 관계 속에서 막무가내 토라지고 뒤틀리고 삐진 내가 보인다. 비로소 나를 달래고 비우고 바로 세울 수 있는 길이 보인다.

추방하려는 나와 방어막을 치고 억지를 부리는 나는 그렇게 또 싸우기도 하고 어깨동무도 하며 자리를 바꾸어 가며 더불어 살아왔다. 그렇게 오늘도 거듭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이 치고 해가 뜬다. 그러는 동안 막힌 가슴이 후련해지기도 한다.

돌아보니 격정 없는 한 순간도 없었다. 격정은 나를 끌고 온 또 다른 나였다. 격정 없는 삶은 주검과 다름없다. 소나기 맞은 풀처럼 격정 덕분에 훌쩍 자란 나를 바라본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를 키운 8할은 격정이었다.

한순간 기쁨을 위해 수많은 불편을 수용해야 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위해 수없는 가시덩굴을 견뎌야 한다. 한 번의 완성을 꿈꾸며 수없는 실패를 기쁘게 극복해야 한다.

걷다 보면 절로 차분해지고 너그러워진다. 그러면 온갖 격정들도 수그러진다. 대신 수그러진 욕망을 불의에 항거하고 연민에 망설이지 않는 긍정적 격정으로 창조로 예술로 평화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올곧게 잡아 준다.

세찬 비바람이 휩쓸고 간 바다는 더 맑아지고, 길은 더 투명하게 명징해진다. 내 마음 바닥도 한결 청아해진다.

청소된 마음으로 오늘 산모퉁이 외딴집을 나선다. 또 새로운 격정을 만나러 세상에 나선다. 그렇게 세상을 걷고, 삶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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