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의 원칙- 김정연 동신대 언어치료학과 2학년
2022년 11월 08일(화) 00:45
우리의 삶은 선택의 순간으로 구성돼 있다. 오늘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부터 내일 시험인데 공부를 할지 말지 등등 사소한 것부터 내 인생을 좌우할 큰 힘을 가진 것까지 다양한 선택의 바다에서 우리는 헤엄친다.

선택은 다시금 여러 가지로 나누어진다. 나의 선택으로 온전히 나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 혹은 너와 나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있다. 이는 또 다시 온전히 나만의 선택일 수도, 한 명 한 명의 선택이 모인 커다란 움직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주의란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사상 또는 정치 제도를 뜻한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바로 투표다.

우리는 투표를 통해 나라를 이끌어갈 대표를 뽑는다. 이때 다수결의 원리를 따른다. 다수결의 원리는 민주 사회의 의사결정 방식이다. 의사결정에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만장일치이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수결의 원칙을 적용한다.

다수결의 원리는 소수의 판단보다 다수의 판단이 더 합리적일 것이라는 가정 하에 진행된다. 그러나 다수의 판단이 모두 합리적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또한 올바른 소수 의견의 배제나 ‘다수의 횡포’에 대한 우려도 있다.

‘다수의 횡포’는 알렉시 드 토크빌의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 잘 설명돼 있다. 이 책은 민주주의 제도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민주주의 다수결 투표 제도의 문제로 다수의 횡포, 이에 따른 입법과 행정의 불안정, 여론 정치, 정부의 타락, 정치인의 포퓰리즘화를 지적하고 있다. 특히 ‘다수에게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며 다수의 의견이 민주주의의 기반이 될 수는 있으나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도 다수의 지지를 받는다고 당연한 진리가 아니고 소수의 견해들도 경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고대 그리스 시대에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아테네, 로마 시대 행해진 예수의 처형을 제시하며, 다수의 의견이 항상 진리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수결의 원리는 마치 약과 같다. 약은 우리의 삶에 이롭지만 과용하거나 남용하게 될 때는 독으로 돌아온다. 독으로 돌아온 약은 우리의 몸을 더 약화시키고 아프게 만든다. 여론과 다수결 또한 그렇다. 다수결을 수량적 측면으로만 생각하면 올바른 소수 의견이 배척당하는 경우가 생겨 중우정치(衆愚政治)나 다수의 횡포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많은 사람이 승복할 수 있는 합리적 절차가 필요한 이유다.

우리는 그릇된 선택이 아닌 올바른 선택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려는 경향이 강하다. 다만 다수의 의견이 진실이지 않을 수도, 정의롭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소수와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와 타협의 과정을 거칠 수 있다. 충분한 대화와 토론을 거쳐야 다수결의 원칙이 민주적인 의사 결정 방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 특히 정치권을 보면 이런 대화와 타협, 토론이 실종된 것 같아 안타깝다.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자세가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이고 대화와 타협, 토론이 정치의 근본인데 이런 과정이 모두 생략되고 있다.

다수결은 쉽고 빠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늘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찬성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 언제나 옳다고 할 수 없다. 가치 판단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기에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한쪽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들을 보고, 경험하고, 배워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어느 때보다 공부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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