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소화기-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2022년 08월 01일(월) 02:00 가가
잠결에 깜짝 놀란다. 화장실에 가려는데 어떤 녀석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오밤중에 방구석에 웅크리고 나를 주시하고 있는 녀석, 얼굴에 핏대를 세우고 날카롭게 나를 쏘아보고 있다. 녀석을 피해 슬그머니 화장실을 다녀온다.
우두망찰 멍을 때리고 서 있는 녀석, 자칭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지만 녀석을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오늘도 온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 허구한 날, 새침하게 앉아 있는 녀석이다. 손발도 없이 뭉툭한 허리에 코끼리처럼 생긴 해괴망측한 코만 덜렁 드러낸 채 덩그러니 앉아 있다.
오랫동안 안방에 모셨는데 좀체 정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귀찮아서 출입구로 그리고 이젠 화장실 입구까지 쫓아냈다. 딱히 속상하게 한 적은 없지만 살면서 한 번도 쓸모없었고, 도움이 된 적 없는 녀석이다. 온몸이 붉어서 혐오감까지 주는 녀석, 꼭 술에 만취한 내 모습 같아서, 밤중에 마주치면 깜짝깜짝 놀란다. 얼마 전에는 한잔하고 들어왔는데 녀석이 내 발을 거는 바람에 넘어지기까지 하였다.
녀석 비슷하게 사각 얼굴을 한 놈을 길거리에서 보곤 했다. 녀석 사촌인지 형인지 몰라도 덩치는 컸는데, 주로 사거리나 관공서 앞에서 초병처럼 서 있었다. 녀석이 불쌍했는지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얼 넣어주곤 한다. 그때마다 녀석은 쩍 벌린 입으로 하얀 봉투를 냉큼 받아먹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시치미를 뚝 뗀다.
그나저나 미운 녀석, 오늘 밤은 기어코 추방해야겠다고 작심을 하고 출근했다. 그래서인지 여태 보이지 않던 녀석이 회사 여기저기 보인다. 마치 북파 공작원처럼 출입구는 물론이고 계단이나 화장실 곳곳에 침투해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쏘아본다. 방구석과 창고, 차 트렁크에도 있다. 흡사 도깨비 같다. 녀석을 몰래 버리려는데, 과장님이 조만간 어느 기관에서 점검 나온다며 하필 녀석들 근황을 알아보란다.
하는 수 없이 돌아섰다. 녀석은 감나무에 달린 홍시처럼 회사 곳곳에 주렁주렁 매달린 채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경계의 눈빛을 멈춘 적이 없다.
하루 이틀, 일주일 이 주일, 한 달 두 달, 그렇게 1년이고 2년이고 견뎌 내고 있는 그 끈기에 은근히 짜증이 난다. 아니 질투가 난다.
내게는 눈곱만큼도 없는 저 인내심으로 녀석은 매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무엇인가를 저리 절실하게 기다리는 힘, 이보다 더 행복한 삶이 어디 있는가. 매일 퇴근 시간만 바라보고 사는 성급한 사내를 얼마나 한심하게 보았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 이랬다저랬다 하는 마음은 또 어떤가.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녀석을 부숴 버리고 싶었다.
녀석을 질투하는 내 가슴에 심화(心火)가 요탑(繞塔)처럼 불꽃이 맹렬히 일었다. 선덕여왕처럼 녀석은 내 잠자는 심장에 반지를 올려 나를 이글이글 태워 버리려나 보다. 그러면 여왕을 사랑한 지귀(志鬼)의 가슴이 타오르듯, 내 가슴에서 번진 불길이 마을을 도시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지.
하지만 애써 타오르는 미움을 눌러 앉힌다. 오매불망 저 정신, 저 진득한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곁에 슬그머니 앉는다. 정신을 모아본다. 손을 없애고 발을 없애고 그렇게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어 본다. 아니 아무 쓸모가 없을 때 비로소 빛나는 그가 되어 본다. 그리고 진정 필요할 때 온몸을 쏟아붓는, 자신을 버리고 뛰어드는 용기를 떠올려 본다.
문득 ‘연탄불 함부로 차지 마라’라는 어느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다.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그 어떤 것보다 더 값진, 주연을 빛나게 하는 조연들, 그들이야말로 진짜 주연은 아닐까.
내 몸에도 혹시 저 녀석과 같이 숨어 있는 녀석, 내가 깨우기를 기다리고 있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녀석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 오늘은 내 몸속에 그 누군가를 위해 종일 자신의 삶을 기다림으로 채운 녀석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더불어 버럭 하는 내 심화를 다스릴 녀석도 하나 마음속에 들여야겠다.
우두망찰 멍을 때리고 서 있는 녀석, 자칭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지만 녀석을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오늘도 온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 허구한 날, 새침하게 앉아 있는 녀석이다. 손발도 없이 뭉툭한 허리에 코끼리처럼 생긴 해괴망측한 코만 덜렁 드러낸 채 덩그러니 앉아 있다.
녀석 비슷하게 사각 얼굴을 한 놈을 길거리에서 보곤 했다. 녀석 사촌인지 형인지 몰라도 덩치는 컸는데, 주로 사거리나 관공서 앞에서 초병처럼 서 있었다. 녀석이 불쌍했는지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얼 넣어주곤 한다. 그때마다 녀석은 쩍 벌린 입으로 하얀 봉투를 냉큼 받아먹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시치미를 뚝 뗀다.
하루 이틀, 일주일 이 주일, 한 달 두 달, 그렇게 1년이고 2년이고 견뎌 내고 있는 그 끈기에 은근히 짜증이 난다. 아니 질투가 난다.
내게는 눈곱만큼도 없는 저 인내심으로 녀석은 매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무엇인가를 저리 절실하게 기다리는 힘, 이보다 더 행복한 삶이 어디 있는가. 매일 퇴근 시간만 바라보고 사는 성급한 사내를 얼마나 한심하게 보았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 이랬다저랬다 하는 마음은 또 어떤가.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녀석을 부숴 버리고 싶었다.
녀석을 질투하는 내 가슴에 심화(心火)가 요탑(繞塔)처럼 불꽃이 맹렬히 일었다. 선덕여왕처럼 녀석은 내 잠자는 심장에 반지를 올려 나를 이글이글 태워 버리려나 보다. 그러면 여왕을 사랑한 지귀(志鬼)의 가슴이 타오르듯, 내 가슴에서 번진 불길이 마을을 도시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지.
하지만 애써 타오르는 미움을 눌러 앉힌다. 오매불망 저 정신, 저 진득한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곁에 슬그머니 앉는다. 정신을 모아본다. 손을 없애고 발을 없애고 그렇게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어 본다. 아니 아무 쓸모가 없을 때 비로소 빛나는 그가 되어 본다. 그리고 진정 필요할 때 온몸을 쏟아붓는, 자신을 버리고 뛰어드는 용기를 떠올려 본다.
문득 ‘연탄불 함부로 차지 마라’라는 어느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다.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그 어떤 것보다 더 값진, 주연을 빛나게 하는 조연들, 그들이야말로 진짜 주연은 아닐까.
내 몸에도 혹시 저 녀석과 같이 숨어 있는 녀석, 내가 깨우기를 기다리고 있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녀석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 오늘은 내 몸속에 그 누군가를 위해 종일 자신의 삶을 기다림으로 채운 녀석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더불어 버럭 하는 내 심화를 다스릴 녀석도 하나 마음속에 들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