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全人)적 존재-황성호 신부·가톨릭 광주사회복지회
2022년 07월 22일(금) 00:45 가가
필자는 천주교 광주대교구 가톨릭 광주사회복지회에서 부국장 책임을 맡고 있다. 국가나 지자체로부터 위탁받은 복지시설을 운영하거나 법인에서 직영하는 시설들이 있다. 가톨릭 정신으로 우리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변방으로 밀려나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있다.
‘보편성’의 의미를 지닌 가톨릭 정신은 고스란히 가톨릭 광주사회복지회의 정체성으로 연결되어 활동의 동력이 되고 있다. 가톨릭 광주사회복지회의 정체성은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완전한 행복을 위해, 훼손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이야기하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근거와 예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며 지키려 했던 인간의 존엄성 회복이 바로 가톨릭 우리가 지향하는 정체성이다.
하느님 모상(Imago Dei)의 의미는 ‘나’는 곧 ‘너’이고 ‘나, 너’는 곧 ‘우리’가 되어 차별을 자아내는 월등과 우월의 시각에서 벗어나 동동한 존재의 인식이다. 또한 인간이 지닌 외적인 영역의 육체와 그 육체의 필요성에 국한되지 않고 영적이며 내적인 존재, 곧 정신적인 존재의 영역까지도 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의미에 담겨 있다. 그래서 국가 사회복지와 가톨릭 사회복지는 서로 협력해야 하는 상호 보완적 역할의 당위성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단순히 욕구를 채워 주는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전인적(육체, 영혼, 정신, 마음)으로 인간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를 전인(全人)적인 존재라고 하는 이유는 육체적 존재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 ‘전인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 교육이 필요한데,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전인교육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육체적이고 영적인 존재다. 그러나 우리의 소비적인 삶과 경쟁 의식은 내적이고 정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영적인 부분을 망각하게 한다. 우리의 본능은 소유하는 것에 익숙하고, 경쟁에서 지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한다. 그래서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해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즐거움만을 쫓아 급기야 쾌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보이는 것에 집중하니 정작 내면은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소비와 경쟁으로 평가하여 우리의 가치를 계산하게 될 것이다. 내적인 존재이기도 한 우리의 관계성이 점점 삭막해지는 이유이다. 우리 사회의 서열화가 그렇고, 차별과 폭력이 존재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변화와 발전이 가능하다. 그러나 결과론자처럼 소비와 경쟁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하여 살아남은 자만이 진정한 가치를 부여받게 되어 버린 세상이다. 이런 천박한 자본주의적 시각으로 전인적 존재인 우리가 평가받을 때, 동등한 존재에 차별이 생기고, 동등이 아니라 우월과 하등이라는 기준으로 폭력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어떻게 얻은 승리인데 그 기쁨을 누리지 않고 숨기겠는가? 우리의 존재가 이토록 역설적인 존재인가? 갑자기 “인간을 수단화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임마누엘 칸트의 말이 떠오른다.
가톨릭 광주사회복지회의 정체성은 인간 존재 그 자체로 사랑으로 섬김을 받아야 하는 보편적이며 전인적인 존재를 지향하고 있다. 단순히 부족한 것을 채워 주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기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기의 편안함과 풍요로움을 위해 목적 그 자체인 전인적인 존재 인간을 수단화한다면, 그런 자는 자기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과 동등한 존재를 지닌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사람대접을 받으려고 한다면 이 또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부정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짓밟는 모습은 결국 자기 존재도 또한 짓밟혀도 된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존재는 육체적이고 영적인 존재다. 그러나 우리의 소비적인 삶과 경쟁 의식은 내적이고 정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영적인 부분을 망각하게 한다. 우리의 본능은 소유하는 것에 익숙하고, 경쟁에서 지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한다. 그래서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해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즐거움만을 쫓아 급기야 쾌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보이는 것에 집중하니 정작 내면은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소비와 경쟁으로 평가하여 우리의 가치를 계산하게 될 것이다. 내적인 존재이기도 한 우리의 관계성이 점점 삭막해지는 이유이다. 우리 사회의 서열화가 그렇고, 차별과 폭력이 존재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변화와 발전이 가능하다. 그러나 결과론자처럼 소비와 경쟁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하여 살아남은 자만이 진정한 가치를 부여받게 되어 버린 세상이다. 이런 천박한 자본주의적 시각으로 전인적 존재인 우리가 평가받을 때, 동등한 존재에 차별이 생기고, 동등이 아니라 우월과 하등이라는 기준으로 폭력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어떻게 얻은 승리인데 그 기쁨을 누리지 않고 숨기겠는가? 우리의 존재가 이토록 역설적인 존재인가? 갑자기 “인간을 수단화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임마누엘 칸트의 말이 떠오른다.
가톨릭 광주사회복지회의 정체성은 인간 존재 그 자체로 사랑으로 섬김을 받아야 하는 보편적이며 전인적인 존재를 지향하고 있다. 단순히 부족한 것을 채워 주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기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기의 편안함과 풍요로움을 위해 목적 그 자체인 전인적인 존재 인간을 수단화한다면, 그런 자는 자기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과 동등한 존재를 지닌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사람대접을 받으려고 한다면 이 또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부정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짓밟는 모습은 결국 자기 존재도 또한 짓밟혀도 된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