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예향] 길 걷다 문득 만나는 작은미술관
2025년 08월 10일(일) 17:45
yeonggwang Museum
길 걷다 문득 만나는 작은미술관

법성포구에 자리한 작은미술관. 바닷바람이 부는 풍경 속에서 미술관을 만난다는 건 낯선 경험이다. /최현배 기자

바닷물이 빠진 자리에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조용한 어촌마을. 언제부터인가 마을 한켠에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유리로 제작된 컨테이너가 놓여 있다. 유리벽 너머엔 몇 점의 그림이 걸려있고 컨테이너 뒤로는 갯벌이 펼쳐져 있다. 인근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온 듯한 한 여성이 앞을 지나가다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고 안을 들여다본다.

바닷바람이 부는 풍경 속에서 미술관을 만난다는 건 좀처럼 낯선 경험이다. 그 낯섦이 주는 새로움, 영광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은 변화의 시작이다. 관람객은 없지만 그 고요함이 오히려 작품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도시의 미술관에서는 느끼기 힘든, 바람과 빛이 전시에 스며드는 풍경이다.

‘작은미술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곳은 지난 3월부터 영광군이 시범 운영을 시작한 새로운 문화 실험 공간이다. 백수해안도로, 법성포, 염산면 등 4곳에 통유리 컨테이너로 설치된 미술관들은 마을과 관광지 한복판에 조용히 놓여 있다.

영광군이 시범 운영 중인 작은미술관 전시 작품들. 도시의 미술관에서는 느끼기 힘든, 바람과 빛이 전시에 스며드는 풍경이다. <영광군>
공간은 작고, 시스템은 아직 미흡하지만 출발은 꽤 신선하다. 전시장이라기보다는 외부에 열려 있는 ‘풍경 속의 액자’처럼 언제든지 지나다 잠깐 들여다볼 수 있는 생활밀착형 미술관이다. 누구나, 언제든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미술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영광군은 지역 주민과 관광객 모두가 일상 속에서 문화예술을 가까이 누릴 수 있도록 작은 전시관들을 만들었다. 생활문화 진흥을 위한 시설 확충의 일환으로 기획됐다. 통유리 컨테이너 구조는 관리비를 줄이는 동시에 지역민들의 야외 관람을 유도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각각의 미술관은 모두 마을의 특색이 묻어나는 장소에 놓였다. 백수해안도로 노을광장, 법성포구와 뉴타운, 염산면사무소 광장까지. 모두 지나가는 사람과 마주하는 거리의 공간들이다.

법성포 작은미술관에 전시 중인 정상윤 사진전 ‘창+시간과 공간의 대화’. <영광군>
가장 큰 미술관은 법성포 뉴타운 야외무대 옆 27㎡(8평) 규모다. 그 외 세 곳은 각각 18㎡(5평) 남짓한 소형 전시관. 작지만 이곳에는 제법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다.

법성포 작은미술관에서는 지난 5월 말, 국가무형문화재 법성포단오제 기간을 맞아 ‘법성포와 단오제’ 특별전이 열렸다. 법성포 파시와 숲쟁이 국악경연대회, 과거 단오제의 흥겨운 장면들을 담은 45장의 사진이 영상으로 흐르고 그 옆에 국악 경연, 줄타기, 용왕제 사진 등이 함께 걸렸다. 일제강점기 파시의 활기를 간직한 항구마을에서, 민속예술의 중심이 된 법성포의 시간들이 유리벽 뒤 영상 속에 고요히 흘렀다.

법성포 뉴타운의 또 다른 미술관에서는 백수읍 출신 사진작가 정상윤의 사진전 ‘창+시간과 공간의 대화’가 열리고 있었다. 미술관 앞에 걸린 작가의 작품설명을 한참 들여다본다.

‘우리는 창을 통해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가 보는 것이 사실일까. 사실이라 믿으며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지 않는지. 창의 크기에 따라 세상은 또 얼마나 달라 보이던지. 타인에게 창을 열어 내면까지 들여다보려 노력한다면 관계의 갈등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내 마음의 창부터 활짝 열어볼 일이다.’

일상을 가로지르는 창, 그 너머로 마주한 공간들이 조용히 말을 거는 듯 하다. 이 미술관이야말로 마을과 예술을 이어주는 통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을 가져본다.

백수 작은미술관에서는 백수읍 노인복지관 어르신들의 서예전 ‘서예로 이야기하는 고전시’가 열렸다. 전문 서예가들의 작품은 아니지만 빼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서예 작품에는 시조의 구절이 정갈하게 담겼다. 이에 앞서 이곳에서는 사진작가 강철의 조류 사진전도 있었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새들의 모습, 그리고 사라져가는 풍경의 잔상들이 사진 안에 남겨져 있다. 이 전시는 지역 작가가 바라보는 자연에 대한 기록이자, 백수라는 공간의 생태적 감수성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염산면사무소에 위치한 작은미술관. 염산초 학생들이 그린 그림이 전시돼 있다. /최현배 기자
염산 작은미술관은 가장 정감 있는 전시로 채워졌다. 염산초등학교 5학년 학생 5명의 그림전 ‘명화 작품 속에 나타난 색의 감정’. 아이들은 고흐와 샤갈, 피카소의 색을 따라 감정을 표현했고, 그 그림들이 고스란히 유리벽 안에 전시됐다. 시골마을의 초등학생들이 비록 규모는 작지만 자신들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전시회를 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유리벽 너머로 자신의 작품이 걸린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아이들에게는 이 작은 공간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미술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전문 큐레이터의 손길은 미치지 못했지만, 작은 전시 안에는 분명한 지역의 맥락과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각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영광에 거주하며 생업과 창작을 병행하는 작가들의 손에서 나왔다.

누군가는 고향을 찾아와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복지관 프로그램을 통해 서예를 배우고, 아이들은 학교 수업 중 그린 그림을 선보인다. 전시의 주제도 지역에 뿌리를 둔다. 법성포 단오제, 백수의 노을, 염산의 아이들까지…. 미술관이 그럴싸한 건축물에서만이 아닌 생활 속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영광군은 ‘작은미술관’을 활성화하기 위해 내년부터 예산을 확대하고, 지역 작가전, 청년 작가전, 관외 작가전, 세계 명화전까지 포함한 기획전을 운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늘막 설치, 안내 표지 개선 등 관람 환경도 꾸준히 보완해 나갈 계획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은미술관’이 단발성 프로젝트가 아닌 지역 속에 천천히 스며드는 문화 인프라로 자리 잡는 일이다. 갯벌 옆 유리관 안에서 펼쳐지는 전시, 해풍을 맞으며 작품을 바라보는 시간이야말로 영광군이 만들어내고 있는 문화예술의 작은 물결이다.

완성형 미술관이 아니어도 좋다. 아직까지는 존재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시골 어촌마을에서 미술을 꿈꾸고, 일상을 예술로 연결하는 그 시작 자체가 소중하다. 바다와 갯벌, 유리벽에 비친 마을의 풍경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작은미술관이 희망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이보람·김창원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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