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 프로필 사진 그리고 마트-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2년 05월 13일(금) 00:30 가가
바야흐로 선거철이 도래했다. 절에 가만 앉아 있어도 이 사람, 저 사람 찾아온다. 늙은 사람, 젊은 사람, 처음 나오는 사람, 익히 이름이 알려진 사람. 한결같이 나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이야기한다. 같이 있노라면 그 사람의 행복 에너지가 내게도 전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왠지 내가 저 사람에게 소중한 사람인 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절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 그나마 내가 누리는 소소한 재미 중 하나는 마트에 가는 것이다. 마트에 가면 너무나도 많은 물건들이 너무나도 이쁜 옷을 입고 너무나도 이쁘게 진열되어 있다. 그 물건의 쓰임새나 실제 효능과 무관하게 마트에 진열된 물건들은 진열되어 있는 그 자체로 보는 이에게 행복감을 선사한다. 아니, 마트라는 세계 자체가 무한 행복과 무한 긍정 에너지를 내뿜고 있다. 그저 마트를 돌아다니기만 해도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우울한 날이면 마트만큼 손쉽게 기분전환 할 수 있는 곳도 그리 많지 않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연예인처럼 차려 입고 연예인처럼 포즈를 취해서 카톡 같은 SNS의 프로필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겨우 서너 장의 사진을 찍는데 150만 원가량 든다고 한다. 당연히 전문가가 찍을 것이고 의상, 액세서리 같은 것들 일체를 대여해 준다. 최대한 멋지게 포장된 자신을 가상 세계의 자신의 모습으로 삼는다. ‘누가 그런 걸 하나?’ 싶은데 문전성시라고 한다.
프로필 사진 속 자신은 현실의 자신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가장 아름답고 멋진 모습으로 연출한 결과이지, 일상의 나는 아니다. 비록 그럴지라도 프로필 사진의 나는 가상 세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가상 세계는 자신만의 생태계를 꾸리고 그 안에서 경제활동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더 이상 현실 세계를 보완해 주는 정도가 아니다. 메타버스라는 게 그런 거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가상 세계가 현실 세계와 별개의 독립된 세계라 하더라도 가상 세계는 그 속성상 현실 세계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가상 세계 속의 ‘나’가 완전히 독립된 인격체가 되지 않는 이상, 가상 세계 속의 나는 현실의 나에게 물리적으로 귀속될 수밖에 없다. 영화 ‘매트릭스’가 상상했던 그런 세계가 아니라면 말이다.
마트의 물건들은 마트의 진열대에 다른 상품들과 함께 진열되어 있을 때에만 내게 무한 행복과 긍정의 힘을 준다. 마트를 빠져나와 나의 공간 어디쯤에 그 상품이 자리하게 되면 그것은 그냥 흔한 생필품이 되어 버린다. 심지어 자신을 포장하고 있던 껍데기를 미련 없이 벗어 던지며, 쓸데없이 많은 쓰레기를 양산한다. 나의 일상으로 들어오는 순간 한낱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마트 자체가 주는 행복감도 사실은 철저하게 의도된 것이다. 그늘진 곳 하나 없이 비정상적으로 환하게 밝은 마트 내부의 조명과 거기에 진열된 상품들의 어마어마하게 많은 물량이 주는 비정상적인 풍요로움이 행복감의 원천이다.
당돌하게도 SNS 프로필 사진의 나는 현실의 내 주머니를 털어서 현실 속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 마트가 추구하는 것은 나의 욕망을 자극하여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마트에서 돈을 쓰게 하는 것이다. 후보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대한 좋은 인상과 호감을 줘서 나의 한 표를 자신에게 쓰도록 하는 것이다.
소비가 미덕인 정도를 넘어서 소비가 사회를 지탱하는 시대다. 소비는 결국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자본주의는 그리고 현대사회는 욕망을 먹고 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필요 이상으로 과열된 욕망, 즉 탐욕을 먹고 산다. 급기야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마저도 탐욕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니 어떻게든 당선되고자 안간힘을 쓰는 정치 후보자들을 탓하기만 할 수도 없다. 그들의 모습이나 일상 속 우리들의 모습이나 다를 것이 별반 없다. 탐욕이 진실을 은폐하는 세상이다.
절집에서 열심히 수행하는 수행자를 일러 눈 밝은 납자(衲子)라고 한다. 여기서 납(衲)은 바느질을 해서 깁다는 뜻이다.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버린 천들을 모아 기워서 옷을 해 입었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수행자라면 항상 깨어서 청빈하게 살아야 함을 일깨우는 말이다. 여전히 눈 밝은 납자가 되지 못한 나는, 며칠 전에도 마트에 다녀왔다. 정치 후보자들과 마트가 나의 스승이다.
마트의 물건들은 마트의 진열대에 다른 상품들과 함께 진열되어 있을 때에만 내게 무한 행복과 긍정의 힘을 준다. 마트를 빠져나와 나의 공간 어디쯤에 그 상품이 자리하게 되면 그것은 그냥 흔한 생필품이 되어 버린다. 심지어 자신을 포장하고 있던 껍데기를 미련 없이 벗어 던지며, 쓸데없이 많은 쓰레기를 양산한다. 나의 일상으로 들어오는 순간 한낱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마트 자체가 주는 행복감도 사실은 철저하게 의도된 것이다. 그늘진 곳 하나 없이 비정상적으로 환하게 밝은 마트 내부의 조명과 거기에 진열된 상품들의 어마어마하게 많은 물량이 주는 비정상적인 풍요로움이 행복감의 원천이다.
당돌하게도 SNS 프로필 사진의 나는 현실의 내 주머니를 털어서 현실 속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 마트가 추구하는 것은 나의 욕망을 자극하여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마트에서 돈을 쓰게 하는 것이다. 후보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대한 좋은 인상과 호감을 줘서 나의 한 표를 자신에게 쓰도록 하는 것이다.
소비가 미덕인 정도를 넘어서 소비가 사회를 지탱하는 시대다. 소비는 결국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자본주의는 그리고 현대사회는 욕망을 먹고 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필요 이상으로 과열된 욕망, 즉 탐욕을 먹고 산다. 급기야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마저도 탐욕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니 어떻게든 당선되고자 안간힘을 쓰는 정치 후보자들을 탓하기만 할 수도 없다. 그들의 모습이나 일상 속 우리들의 모습이나 다를 것이 별반 없다. 탐욕이 진실을 은폐하는 세상이다.
절집에서 열심히 수행하는 수행자를 일러 눈 밝은 납자(衲子)라고 한다. 여기서 납(衲)은 바느질을 해서 깁다는 뜻이다.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버린 천들을 모아 기워서 옷을 해 입었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수행자라면 항상 깨어서 청빈하게 살아야 함을 일깨우는 말이다. 여전히 눈 밝은 납자가 되지 못한 나는, 며칠 전에도 마트에 다녀왔다. 정치 후보자들과 마트가 나의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