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듣고 믿음으로 본다-김원명 광주원음방송 교무
2022년 04월 15일(금) 03:00 가가
‘철이 든다’는 것을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박중빈 1891~1943)께서는 “관계를 알아가는 것”이라 하셨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나서는 부모 자식 된 도리도 모르고 형제도 내력도 모르다가 차차 자라면서 그 관계와 도리를 알아 가듯이, 진리를 깨쳐 가는 것도 진리와 나와의 관계를 알고 천지 만물과의 관계를 알아서 그 도리를 깨닫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원불교 대각개교절(大覺開敎節: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을 이룬 날. 원불교가 실질적으로 개교한 날로 보아 경축하는 원불교의 최대 경축일)이 4월 28일이다. 이맘때쯤 원불교 성지인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 영산성지에는 많은 손님들이 다녀간다. 성지 순례 차 온 교당의 교도들이 주가 되지만 타 종교인들도 찾아오고 가끔은 계시를 받고 찾아왔다는 사람들도 있다.
예전에 몇 분의 손님을 안내하게 되었다. 계시를 받고 왔다는 이들은 그렇게 엉뚱한 언행도 하지 않고 생김새도 일반 사회인과 다를 바 없고, 나이도 사십 전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종사의 행적에 대하여 묻고는 돌아갔는데 얼마 지나서 ‘성산성지(聖山聖地) 한반도’라는 책을 보내 왔다. 내용을 보니 우주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와 지상의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대종사를 석가모니 부처님의 후신이라 하여 크게 찬양하기도 하였다. 대종사를 새 주세불임을 믿는 바이기는 하나 그런 이들로부터 신기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솔깃한 호기심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신통을 경계하신 바도 있고 하여 가볍게 스쳐 버리긴 하나 사물을 보고 느끼는 바가 사람에 따라 다양하다는 생각을 새삼 느끼게 된다.
사실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는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극히 평범한 산촌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서나 흔히 보는 바위산이고 소나무 숲이다. 잡목이 적은 만큼 철에 따른 변화도 없고 구십구 봉이라 하나 깊은 골이 없어 큰 내를 이루지도 못한다. 성탄지 대각지를 비롯하여 많은 기념지가 있으나 아직 정성스럽게 장엄도 하지 못한 채 보존에만 그치고 있는 실정이어서 기대를 가지고 순례를 오는 이들에게 자칫 실망이라도 주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생각을 하고 지낸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성지(聖地)가 거룩한 땅이 되는 것은 경관이 수려하거나 어떤 장엄이 거대해서가 아니라 그 땅에 어린 성자의 거룩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순례 차 온 손님들에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순례가 되라고 당부를 하곤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거나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는 것이 형식논리에서 보면 모순된 말이기는 하나 나타난 이면의 뜻이기도 하고 육안(肉眼)으로만 보지 말고 심안(心眼)으로 보라는 말이기도 하다. 실은 마음의 눈을 가지고 본다는 일이 스스로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일임을 생각할 때는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으로 본다는 것이 특별한 심령(心靈)이 열려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깊은 믿음과 애정을 가지고 보면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되리라는 생각에서,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뜻에서 강조하곤 한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하는 구절을 떠올려 보면 빼앗긴 조국에 대한 작자의 연민과 애틋함, 흙에 대한 끝없는 정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심정으로 성지를 걸으면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서도 새로운 느낌을 전달받게 된다. 대종사에 대한 깊은 신앙을 지니고 순례를 오는 이들에게서 남다른 감격을 지니고 성지를 떠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침 이슬에 신발이 다 젖도록 정관평(貞觀坪: 원불교 초기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앞바다를 막아 만든 농토)을 돌아보고 삼밭재 험한 길을 숨차게 다녀와서도 피로한 기색보다 깊은 감회와 법열이 얼굴에 넘치는 것을 볼 수 있다.
믿음을 가지고 걷고, 믿음을 가지고 보고, 믿음을 가지고 들으려 하는 데서 진정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들리지 않는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리라 본다. 마음으로 본다는 것이 확연한 깨달음으로 영계(靈界)를 보거나 삼세(三世)를 관통하는 일이 되기도 하겠지만,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애정으로 귀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 가는 일이라 생각해 본다.
이러한 생각에서 순례 차 온 손님들에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순례가 되라고 당부를 하곤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거나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는 것이 형식논리에서 보면 모순된 말이기는 하나 나타난 이면의 뜻이기도 하고 육안(肉眼)으로만 보지 말고 심안(心眼)으로 보라는 말이기도 하다. 실은 마음의 눈을 가지고 본다는 일이 스스로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일임을 생각할 때는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으로 본다는 것이 특별한 심령(心靈)이 열려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깊은 믿음과 애정을 가지고 보면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되리라는 생각에서,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뜻에서 강조하곤 한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하는 구절을 떠올려 보면 빼앗긴 조국에 대한 작자의 연민과 애틋함, 흙에 대한 끝없는 정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심정으로 성지를 걸으면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서도 새로운 느낌을 전달받게 된다. 대종사에 대한 깊은 신앙을 지니고 순례를 오는 이들에게서 남다른 감격을 지니고 성지를 떠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침 이슬에 신발이 다 젖도록 정관평(貞觀坪: 원불교 초기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앞바다를 막아 만든 농토)을 돌아보고 삼밭재 험한 길을 숨차게 다녀와서도 피로한 기색보다 깊은 감회와 법열이 얼굴에 넘치는 것을 볼 수 있다.
믿음을 가지고 걷고, 믿음을 가지고 보고, 믿음을 가지고 들으려 하는 데서 진정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들리지 않는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리라 본다. 마음으로 본다는 것이 확연한 깨달음으로 영계(靈界)를 보거나 삼세(三世)를 관통하는 일이 되기도 하겠지만,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애정으로 귀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 가는 일이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