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인간-황성호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2021년 11월 26일(금) 02:30 가가
어릴 적 놀 때는 경계가 없었다. 우리 동네 아이들과 놀 때도 있었고, 이웃 동네 아이들도 함께 놀 때가 있었다. 학교 운동장이라도 있으면, 동네를 따지지 않았다. 놀 때는 한두 살 나이 차이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친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고, 형이나 누나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던 것 같다. 여러 명이 함께하는 게임도 그냥 편을 나누어 아무 거리낌 없이 놀았었다. 옆 동네로 놀러 가고 싶으면 초대 같은 것은 필요 없이 그냥 놀러 가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닫혀 있지 않았고 항상 열린 채 반겨 주었다. 해가 떨어지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잘가!’라는 인사를 건네는 정이 넘치는 우리의 환경이었다. 다시금 그때로 돌아가면 또 그렇게 경계 없이 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단계적 일상 회복(위드 코로나)이라는 말에 조금은 기지개를 펴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쉽게 생각하지 말고 좀 더 서로를 배려하면서 조심해야 한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로부터 연락이 오고, 비대면의 불완전한 만남이 대면으로 전환되면서 안도하기도 한다.
그런데 엊그제 뉴스를 보다가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한 소식을 접했다.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에서 외부 아이들이 놀았다는 이유와 기물 파손이라는 이름으로 경찰에 신고했다는 소식이었다. 사유지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것이 어떤 문제가 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갑자기 예전의 기억까지 소환되는 느낌이다.
임대아파트 주민을 비하하는 ‘휴거’라는 단어를 들었던 것이 3년 전이다. 그뿐 아니라 ‘임거’ ‘엘거’ ‘빌거’라는 단어들이 아이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렸다. 아이들의 이 말들은 어른들이 수치스럽고 추악하며 천박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면서 발생된 결과였다. 경계를 긋고 구분지어 서로를 나누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관계를 맺어야 하는 인간 존재를 크고 작음, 많고 적음, 좋고 나쁨, 고급과 저급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의 논리로 분리시켜야만 속이 시원한 것인지 모르겠다. 결국 분리하고 구분지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다.
6년을 칠레에서 선교 사제로 살았던 필자는 안데스 산맥의 빙하가 녹아 흘러내려 만든, 거대하고 깨끗하며 끝이 보이지 않았던 호수들을 기억한다. 그 호수들은 유난히도 맑은 물을 담고 있었다. 빙하가 녹아내려 유입되는 물이 많았고, 그 물은 다시 개천이나 강과 같은 물줄기를 만들어 태평양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호수를 채우는 물이 있고, 바다로 호수 물을 빼내는 강줄기가 있으니 당연히 깨끗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들어가는 물만 있고 나가는 물이 없다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아름다운 호수를 만들어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물은 썩어서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죽음의 호수가 되어 악취를 풍기는 것은 당연한 진리가 아닐까?
우리의 존재와 이 존재들의 관계성도 맑은 호수와 같은 모습으로 비쳐볼 수 있다. 우리 인간관계에서 구분지어 나누려는 그 마음 깊숙한 곳에는 탐욕과 착취를 부추기는 악마의 폭력이 감추어져 있다. 결국 분리를 강조하여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지 않겠다는 것으로 모두를 좌초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인간의 기본권은 물론 좋은 관계성을 유지시켰던 나눔·사랑·정이 깃든 보살핌은 폭력에 짓밟히고 악취에 묻혀 사라질 것이다.
예루살렘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과 멀어져 있는 것을 보신 예수는 눈물을 흘리신다. 과부들을 등쳐 먹고, 어린이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도성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내던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차별받을 수 없다. 단지 우리가 감각의 노예가 되어 차별할 뿐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지만 끝없는 소유욕을 부추기는 탐욕의 폭력이 다른 인간이라고 강하게 구분 짓고 있을 뿐이다. 결국 ‘나’와 ‘너’는 같은 인간인데 말이다.
6년을 칠레에서 선교 사제로 살았던 필자는 안데스 산맥의 빙하가 녹아 흘러내려 만든, 거대하고 깨끗하며 끝이 보이지 않았던 호수들을 기억한다. 그 호수들은 유난히도 맑은 물을 담고 있었다. 빙하가 녹아내려 유입되는 물이 많았고, 그 물은 다시 개천이나 강과 같은 물줄기를 만들어 태평양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호수를 채우는 물이 있고, 바다로 호수 물을 빼내는 강줄기가 있으니 당연히 깨끗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들어가는 물만 있고 나가는 물이 없다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아름다운 호수를 만들어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물은 썩어서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죽음의 호수가 되어 악취를 풍기는 것은 당연한 진리가 아닐까?
우리의 존재와 이 존재들의 관계성도 맑은 호수와 같은 모습으로 비쳐볼 수 있다. 우리 인간관계에서 구분지어 나누려는 그 마음 깊숙한 곳에는 탐욕과 착취를 부추기는 악마의 폭력이 감추어져 있다. 결국 분리를 강조하여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지 않겠다는 것으로 모두를 좌초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인간의 기본권은 물론 좋은 관계성을 유지시켰던 나눔·사랑·정이 깃든 보살핌은 폭력에 짓밟히고 악취에 묻혀 사라질 것이다.
예루살렘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과 멀어져 있는 것을 보신 예수는 눈물을 흘리신다. 과부들을 등쳐 먹고, 어린이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도성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내던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차별받을 수 없다. 단지 우리가 감각의 노예가 되어 차별할 뿐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지만 끝없는 소유욕을 부추기는 탐욕의 폭력이 다른 인간이라고 강하게 구분 짓고 있을 뿐이다. 결국 ‘나’와 ‘너’는 같은 인간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