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나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다. 예전에 군대의 수장은 왕이나 귀족이었고, 이들은 당연히 전쟁이 나면 앞장서 싸웠다. 지배층의 병역은 의무를 넘어 리더로서의 필수 덕목이었다.

심지어 삼국사기 ‘계백열전’에는 신라와의 최후 결전을 앞둔 백제의 계백 장군이 가족을 자신의 손으로 참수하고 비장하게 전쟁에 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진위 여부를 떠나 당시 지배층에게 병역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지배층의 병역 의무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완전히 망가진다. 지배층인 양반은 병역에서 제외되고, 오로지 일반 백성만이 군역을 담당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목숨을 바친 군인은 모두 농민을 비롯한 평민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 후기로 갈수록 많은 백성들이 도망을 치거나 뇌물로 사람을 사서 군역을 대신토록 하는 등 병역 비리가 만연했다. 양인 신분을 포기하고 군역 의무가 없는 노비를 자원하거나 승려가 되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3년 강진 유배 시절, 병역을 빌미로 백성을 착취하는 탐관오리와 그 아래 신음하는 백성의 처절한 몸부림을 목격한 뒤에 읊은,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詩)가 있다. 이 시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태어난 지 사흘 된 아기까지 군적에 올라 있어, 이를 면하기 위해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소를 빼앗긴 백성이 ‘자식 낳은 죄’라며 분을 못 이겨 스스로 남성의 상징을 잘랐다는 비참한 얘기를 담고 있다. 이 같은 불공평한 병역 제도와 비리는 지배층에 대한 백성의 불신과 불만을 키워, 결국 조선이 몰락하는 원인이 됐다.

못된 역사의 DNA 탓인지 병역 비리는 현대에까지 숨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왔다. 최근 병역을 회피한 가수 유승준 씨에 대한 한국 비자 발급 거부가 부당하다는 대법원 판결과 관련, 유 씨 입국을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게시 닷새 만에 2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끈질김을 넘어 집요하기까지 한 유 씨 입국 반대는, 한 개인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평민들에게 불평등했던 병역 비리에 대한 반감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채희종 사회부장 ch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