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 생각'] 제사상에 밤을 올리는 이유
2018년 09월 27일(목) 00:00 가가
한 톨의 씨앗을 잉태하고, 여물도록 잘 키워 맺은 뒤, 더 넓은 자리에 퍼뜨리는 일은 나무들이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는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시작은 꽃이다. 꽃만 보고 어떤 모양, 어떤 크기의 씨앗과 열매가 맺힐지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엄지손톱 크기로 작게 피어나는 꽃이 진 뒤에 어른 주먹보다 크게 맺히는 열매가 있는가 하면, 부드러운 솜털처럼 자잘하게 피어난 꽃이 지면 딱딱한 껍질에 싸인 씨앗을 맺는 나무도 있다.
꽃과 열매의 차이가 극적으로 다른 것 가운데 밤나무만 한 것도 없다. 열매를 맺기까지 밤나무는 별다른 특징을 여럿 보여 준다. 꽃이 피어날 때부터 그렇다. 벌·나비와 같은 곤충을 끌어들여 수정해야 하는 여느 꽃들처럼 밤꽃 역시 곤충을 끌어들여야 한다. 하얀 빛깔부터 이유가 있다. 밤꽃 필 즈음인 유월이면 숲의 모든 나무에 초록 잎이 무성해진다. 웬만한 빛깔과 모양으로는 곤충의 눈에 뜨이기 어렵다. 조금이라도 더 잘 눈에 띄게 하기 위해 밤나무는 도드라진 우윳빛으로 꽃을 피운다.
빛깔만으로 안도하기 어려운 밤꽃은 독특한 향기도 피운다. 여느 나무와는 다른 동물성의 비릿한 내음이다. 꽃향기로는 매우 독특하다. 밤꽃 향기에는 동물의 정액에 포함된 스퍼미딘(spermidine)과 스퍼민(spermine) 분자가 들어 있다. 식물의 생식 기관인 꽃에 동물의 생식 기관과 같은 분자가 포함됐다는 이야기다. 이유가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늦은 봄에 피어나는 밤꽃이 그때까지 곤충에게 익숙했던 향기가 아닌 다른 향기로 곤충을 불러들이려는 번식 전략으로 짐작할 수 있다.
꽃이 지면 꽃 진 자리에 송알송알 밤송이가 맺힌다. 밤송이에는 일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특별한 가시가 돋아난다. 손으로 잡기는커녕, 저절로 떨어지는 밤송이에 맞으면 심각한 부상을 입을 우려까지 있다.
대개의 씨앗들은 다른 동물을 이용해 어미 나무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한다. 바람을 이용해 멀리 날아가는 씨앗이 있는가 하면, 동물의 몸에 붙어 이동하는 씨앗도 있다. 또 짐승에게 좋은 먹이가 되기 위해 과육을 발달시켜 씨앗을 둘러싼 과육은 동물에게 내주고, 단단한 껍질로 싸인 씨앗은 짐승의 배설물에 섞여 자리잡기도 한다.
밤송이는 그런데 바람을 이용해 날아갈 수도, 짐승의 몸에 붙어 이동할 수도 없다. 대관절 어쩌려고 저같은 가시를 달아야 했을까. 역시 살아남으려는 전략이다. 독특하다. 사람을 비롯해 짐승들이 맛나게 먹는 밤의 살이 곧 밤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밤나무는 밤톨 하나하나를 속껍질과 겉껍질이라는 이중의 차단막으로 감싸서 보호하려 했지만, 그것만으로 온전히 보호하기 어려웠다. 결국 껍질을 잘 벗겨 낸 사람과 짐승에 의해 밤나무의 씨앗은 분해되고 소화되기 십상이다. 봄부터 애써 지은 한 톨의 생명은 짐승의 뱃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밤나무는 새로운 껍질 한 겹을 더 지어야 했다. 씨앗인 밤톨을 두세 알씩 모은 뒤에 그 겉에 또 하나의 커다란 보호 장치를 만든 것이다. 바로 밤송이의 날카롭고 억센 가시다. 오랜 세월을 거쳐 밤나무가 지어 낸 최적의 생존 장치다. 속껍질, 겉껍질, 밤송이 가시 등 이중 삼중의 보호 장치는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이 틀 때까지 하나의 생명을 온전하게 보호한다. 자식을 제대로 키우기 위한 안간힘의 증거다.
온전히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 뒤에는 이 같은 보호 장치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대개의 경우, 씨앗을 보호하던 견고한 껍질은 순식간에 시들고 썩거나 바람에 날려 가뭇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밤 껍질은 다르다. 싹이 튼 뒤에도 밤 껍질은 뿌리 곁에 남아 있다. 잠깐도 아니고, 나무가 잘 자라 새로 씨앗을 맺을 때까지 몇 년이 지나도 곁에 남는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자신을 잘 지켜 주기 위해 독특한 빛깔과 향기, 그리고 단단한 껍질과 억센 가시를 짓느라 혼신을 다한 어미의 고마운 마음을 오래 기억하는 것으로 여겼다. 조상의 음덕을 기억하는 제사에 올려야 할 음식으로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은 그렇게 시작됐다. 말 없는 나무의 한해살이에서 자식을 낳아 키우기 위해 애면글면 살아온 우리 부모들의 정성을 기억한 조상들의 자연주의적 지혜다. <나무 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빛깔만으로 안도하기 어려운 밤꽃은 독특한 향기도 피운다. 여느 나무와는 다른 동물성의 비릿한 내음이다. 꽃향기로는 매우 독특하다. 밤꽃 향기에는 동물의 정액에 포함된 스퍼미딘(spermidine)과 스퍼민(spermine) 분자가 들어 있다. 식물의 생식 기관인 꽃에 동물의 생식 기관과 같은 분자가 포함됐다는 이야기다. 이유가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늦은 봄에 피어나는 밤꽃이 그때까지 곤충에게 익숙했던 향기가 아닌 다른 향기로 곤충을 불러들이려는 번식 전략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밤송이는 그런데 바람을 이용해 날아갈 수도, 짐승의 몸에 붙어 이동할 수도 없다. 대관절 어쩌려고 저같은 가시를 달아야 했을까. 역시 살아남으려는 전략이다. 독특하다. 사람을 비롯해 짐승들이 맛나게 먹는 밤의 살이 곧 밤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밤나무는 밤톨 하나하나를 속껍질과 겉껍질이라는 이중의 차단막으로 감싸서 보호하려 했지만, 그것만으로 온전히 보호하기 어려웠다. 결국 껍질을 잘 벗겨 낸 사람과 짐승에 의해 밤나무의 씨앗은 분해되고 소화되기 십상이다. 봄부터 애써 지은 한 톨의 생명은 짐승의 뱃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밤나무는 새로운 껍질 한 겹을 더 지어야 했다. 씨앗인 밤톨을 두세 알씩 모은 뒤에 그 겉에 또 하나의 커다란 보호 장치를 만든 것이다. 바로 밤송이의 날카롭고 억센 가시다. 오랜 세월을 거쳐 밤나무가 지어 낸 최적의 생존 장치다. 속껍질, 겉껍질, 밤송이 가시 등 이중 삼중의 보호 장치는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이 틀 때까지 하나의 생명을 온전하게 보호한다. 자식을 제대로 키우기 위한 안간힘의 증거다.
온전히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 뒤에는 이 같은 보호 장치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대개의 경우, 씨앗을 보호하던 견고한 껍질은 순식간에 시들고 썩거나 바람에 날려 가뭇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밤 껍질은 다르다. 싹이 튼 뒤에도 밤 껍질은 뿌리 곁에 남아 있다. 잠깐도 아니고, 나무가 잘 자라 새로 씨앗을 맺을 때까지 몇 년이 지나도 곁에 남는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자신을 잘 지켜 주기 위해 독특한 빛깔과 향기, 그리고 단단한 껍질과 억센 가시를 짓느라 혼신을 다한 어미의 고마운 마음을 오래 기억하는 것으로 여겼다. 조상의 음덕을 기억하는 제사에 올려야 할 음식으로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은 그렇게 시작됐다. 말 없는 나무의 한해살이에서 자식을 낳아 키우기 위해 애면글면 살아온 우리 부모들의 정성을 기억한 조상들의 자연주의적 지혜다. <나무 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