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좌측담장’] 바라지만 말고
2018년 08월 09일(목) 00:00 가가
메이저리그에는 ‘재키 로빈슨 데이’라는 게 있다. 등번호 42번을 달았던 이 선수는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 소속으로 월드 시리즈 우승을 맛봤고, 데뷔 시즌 신인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꾸준한 기록을 보이기는 했지만 압도적으로 대단한 성적은 아니었던 이 선수는 그러나 1962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메이저리그의 최초 흑인 선수다. 지금이야 인종과 국적을 불문하고 누구나 그라운드에 서지만 불과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니그로 리그’라고 하여 유색 인종의 야구 리그가 따로 있었던 미국이었다.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 계약을 맺는 데 있어 가장 큰 변수는 연봉이나 조건이 아니라 ‘부당한 조건’(인종 차별)을 감내할 수 있을지 여부였다. 그는 관중의 노골적인 야유, 상대 투수의 빈볼, 편파적인 판정, 심지어 살인 협박까지 감수해야 했다.
매년 4월 15일은 모든 메이저리그의 선수들이 42번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선다. 이는 재키 로빈슨이 경기에 나서면 총으로 쏴 버리겠다는 누군가의 협박에 “그럼 모두가 42번을 입으면 누군지 모를 거야”라고 했던 동료의 농담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매년 4월 15일은 모든 선수가 흑백이 아닌 등번호와 포지션만으로 구분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날이 된다. 인종 차별과 소수자 혐오를 배척하는 일에 야구가 사회적 목소리를 가장 야구다운 방식으로 내는 날이기도 하다.
한국 프로 야구 초창기의 캐치프레이즈는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이었다. 1982년 개막전 시구는 전두환이 맡았다. 그가 권력을 보전하는 행태로 3S 정책을 펼쳤으며, 프로 야구 또한 그 일환이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권력의 의지로 출범한 프로 야구는 어쩔 수 없이 그 부담을 기업이 떠안아야 했다. 오너의 고향, 초기 사업장, 공장이나 본사의 위치 등을 감안하여 연고지가 할당되었다. 해태 또한 호남을 연고로 한 기업이었기에, 광주에 자리를 잡고 야구단을 차렸던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팀 수가 늘어나고 규모가 팽창했음에도 여전히 한국의 프로 야구는 대기업의 홍보비(쌈짓돈)로 운영되는 구조다. 어찌 됐든 다른 종목에 비해 확고한 연고지 의식이 생성된 것은 사실이다. 연고지를 바탕으로 프로 야구는 국내 스포츠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의 인기와 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됐다. 군사 독재의 부산물로 시작한 야구가 이제는 기업과 지역이라는, 대한민국의 근간을 상징하는 국민의 즐길 거리로 거듭난 것이다.
메이저리그가 미국에서 갖는 영향력보다 KBO(한국야구위원회)가 우리에게 미치는 그것이 더 작다고 할 수 없다. 프로 스포츠 시장을 지배하는 단독자로서, 800만 관중을 현장으로 불러 모으고 그 이상의 팬들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게 하는 콘텐츠는 국내에 없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사회와 공동체에 KBO는 어떤 책임감을 갖고 복무하고 있을까.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지역 차별과 혐오의 정서가, 그 민낯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이 야구장과 야구 게시판이라고 말한다. 워낙 단단한 지역 연고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지역적인 구도가 일정 부분 잡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일부 야구 커뮤니티나 포털의 댓글은 심각한 지점에 이르렀다. 특정 지역을 비하하는 멸칭(蔑稱)이 난무하고 가혹한 비난이 쏟아지는 현장을 그저 일부라고 손 놓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이 야구로부터 비롯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지역과 성별, 나이와 학벌 등 우리 사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을 재단하고 배제한다. 긴 시간 쌓여 온 적폐를 야구가 나서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양적으로 성장한 프로 야구가 성적과 순위나 경기와 플레이가 아닌 방법으로도 팬들에게 돌려줄 것은 돌려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최근 KBO 차원에서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캠페인을 본 적이 없다. 선수 개인의 기부 관련 뉴스는 있어도, 리그 차원의 사회적 역할은 ‘최소한’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재키 로빈슨 데이는 그저 한 선수를 기리는 날이 아니다. 미국의 야구가, 인종 차별에 반대하고 있다는 강력한 선언이다. 이 선언은 야구팬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친다. 우리 프로 야구는 어떤 선언을 하고 있는가. 어떤 영향력을 팬에게 주려고 하는가.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겠다며 시작했는데, 그 어린이들은 이제 세금도 잘 내고 별의별 의무도 다 치러야 하는 40대가 되었다. 이제 한국 프로 야구도 우리 사회에 무언가를 주어야 할 때이다. 바라지만 말고. <시인>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매년 4월 15일은 모든 메이저리그의 선수들이 42번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선다. 이는 재키 로빈슨이 경기에 나서면 총으로 쏴 버리겠다는 누군가의 협박에 “그럼 모두가 42번을 입으면 누군지 모를 거야”라고 했던 동료의 농담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매년 4월 15일은 모든 선수가 흑백이 아닌 등번호와 포지션만으로 구분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날이 된다. 인종 차별과 소수자 혐오를 배척하는 일에 야구가 사회적 목소리를 가장 야구다운 방식으로 내는 날이기도 하다.
메이저리그가 미국에서 갖는 영향력보다 KBO(한국야구위원회)가 우리에게 미치는 그것이 더 작다고 할 수 없다. 프로 스포츠 시장을 지배하는 단독자로서, 800만 관중을 현장으로 불러 모으고 그 이상의 팬들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게 하는 콘텐츠는 국내에 없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사회와 공동체에 KBO는 어떤 책임감을 갖고 복무하고 있을까.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지역 차별과 혐오의 정서가, 그 민낯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이 야구장과 야구 게시판이라고 말한다. 워낙 단단한 지역 연고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지역적인 구도가 일정 부분 잡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일부 야구 커뮤니티나 포털의 댓글은 심각한 지점에 이르렀다. 특정 지역을 비하하는 멸칭(蔑稱)이 난무하고 가혹한 비난이 쏟아지는 현장을 그저 일부라고 손 놓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이 야구로부터 비롯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지역과 성별, 나이와 학벌 등 우리 사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을 재단하고 배제한다. 긴 시간 쌓여 온 적폐를 야구가 나서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양적으로 성장한 프로 야구가 성적과 순위나 경기와 플레이가 아닌 방법으로도 팬들에게 돌려줄 것은 돌려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최근 KBO 차원에서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캠페인을 본 적이 없다. 선수 개인의 기부 관련 뉴스는 있어도, 리그 차원의 사회적 역할은 ‘최소한’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재키 로빈슨 데이는 그저 한 선수를 기리는 날이 아니다. 미국의 야구가, 인종 차별에 반대하고 있다는 강력한 선언이다. 이 선언은 야구팬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친다. 우리 프로 야구는 어떤 선언을 하고 있는가. 어떤 영향력을 팬에게 주려고 하는가.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겠다며 시작했는데, 그 어린이들은 이제 세금도 잘 내고 별의별 의무도 다 치러야 하는 40대가 되었다. 이제 한국 프로 야구도 우리 사회에 무언가를 주어야 할 때이다. 바라지만 말고. <시인>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