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의 사방(四方)과 중앙을 합쳐 오방(五方)이라고 하는데, 그중 남방을 관장하는 염제(炎帝)는 여름과 불도 관장한다. 염제는 적제(赤帝), 화제(火帝)라고도 하는데, 간지(干支)로는 십간(十干) 중에 병(丙)과 정(丁)이 더운 날에 해당한다. 조선 초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권근(權近, 1352~1409)의 시 중에 ‘괴롭게 더운 날에 가다’란 뜻의 ‘고열행’(苦熱行)이란 시가 있다. 그해 여름도 어지간히 더웠던지 ‘음도 양도 숯이 되고 땅과 하늘이 화로가 되었네’로 시작해서, ‘축융(祝融:여름의 신)이 해를 끼고 하늘을 날아가니/ 삼족오(三足烏:태양 속에 사는 세 발 가진 새)가 목말라 죽을까 봐 두려워하네’라고까지 읊었다.

한치윤(韓致奫)은 ‘해동역사’에서 당나라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피서 방법을 전했다. 한여름 날 동료들이 이덕유의 작은 서재로 들어가니 가을날 같은 서늘한 바람이 불었는데 저녁 무렵 밖에 나오니 여전히 불타는 듯한 더위였다. 어떤 호사자(好事者)가 그 비결을 알아봤는데, 그날 쇠로 만든 물동이의 물 위에 백룡 가죽(白龍皮)을 두었더니 찬바람이 일었다는 것이다. 이 백룡 가죽은 신라의 승려가 전해 주었는데 바닷속에서 구한 물건이라 했다. 당나라 강병(康騈)이 지은 ‘극담록 이상국댁’(劇談錄 李相國宅)에는 이 일화의 작은 서재가 사실은 별장인 평천장(平泉莊)이고, 쇠로 만든 물동이가 아니라 황금으로 만든 물동이라고 달리 전하고 있다. 이 고사 이후 이덕유의 평천장은 호화로운 피서 별장을 뜻했다.

염제(炎帝)가 기승을 부리면 천자(天子)도 헉헉대기 마련이라 왕실에서도 피서 별장을 만들었다. 수 문제(文帝)는 개황(開皇) 13년(593) 수도인 장안(長安:서안)에서 서북쪽으로 320리 떨어진 인유현(麟遊縣)에 피서 별궁인 인수궁(人壽宮)을 지었다. 인수궁은 당 태종이 대대적으로 개수해서 구성궁(九成宮)이라고 했는데, 구중궁궐이란 뜻이었다. 당 고종 때 이를 만년궁(萬年宮)으로 개명해 왕조가 만년이 가기를 바라는 뜻을 담았다.

왕조의 피서 별장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청나라 왕실에서 세운 피서산장(避暑山莊)이다. 청 왕실의 피서 산장은 지금의 승덕(承德)인 열하(熱河)에 세웠다. 강희(康熙) 42년(1703)에 시작해서 옹정(雍正)을 거쳐 건륭(乾隆) 57년(1792)까지 무려 89년에 걸쳐 지었다. 인공 호수를 만들고 호수 안의 섬을 비롯해 각종 절경을 만들었는데, 강희제가 36경(景)이라고 이름 지었고, 건륭제가 또 36경을 만들어 모두 72경이라 불리는 명승을 만들었다. 박지원은 정조 4년(1780) 건륭제의 칠순연에 참석하러 가는 종형 박명원을 따라 열하에 갔다. 박명원은 영조의 딸인 화평옹주의 남편으로 금성위(錦城尉)였다. 이때의 기행문인 ‘열하일기’의 ‘황교문답’(黃敎問答)에서 박지원은 “황제는 해마다 만리장성 밖 궁벽한 열하에 주필하는데 천자가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 거친 벽지에 와서 거처하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로 필자가 가 봤던 한 여름의 승덕은 무더운 곳이라서 피서지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박지원은 황제가 해마다 열하에 오는 이유를, ‘몽고가 강했던 것을 알 수 있겠다’라고 해 몽고의 흥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순조 3년(1803) 동지사의 일행으로 연경에 다녀왔던 한 선비가 남긴 ‘계산기정’에도 “황제가 한여름이면 열하에 머물면서 피서 산장이라 일컬으나, 그 실은 스스로 방수(防守)하는 것”이라고 간파하고 있다. 피서 산장이 있는 열하는 고대부터 중원의 한(漢)족과 만주를 포괄하는 동북방의 이족(夷族)을 자연적으로 가르는 연산(燕山) 산맥 자락에 있다. 몽골의 흥기만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중원의 정치를 잘못하면 다시 북방으로 쫓겨 올 수 있다는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황제들이 매년 열하에 간 것이었다. 한여름의 피서지까지도 왕조의 보위를 생각했던 만주족들이었기에 금나라에 이어 청나라까지 두 번이나 거대한 중원의 주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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