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 생각’] 더불어 산다는 것
2018년 07월 05일(목) 00:00 가가
수국 꽃이 피었다. 우리의 여름을 오랫동안 밝히는 아름다운 꽃이다. 여름에 피어나는 대개의 꽃들은 평균적으로 개화 기간이 긴 편이다. 백 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 해서 백일홍나무라고 부르기도 하는 배롱나무가 그렇고,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을 무궁무진하게 피우는 무궁화가 그렇다. 수국도 여름 초입에 피어나서 가을바람 불어올 때까지 꽃을 달고 있는 식물이다.
오래 볼 수 있는 꽃이라는 점은 같지만, 수국은 무궁화나 배롱나무의 개화 방식과 다르다. 무궁화 배롱나무는 한 송이 꽃이 피었다가 지면 다른 가지에서 새 꽃송이가 피어나며 긴 여름을 이어 간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낙화하는 무궁화 꽃이나 한 번 피어난 꽃이 이레에서 열흘 쯤 이어지다가 지는 배롱나무 꽃도 같은 방식이다. 그러나 수국은 한번 피어난 꽃이 그대로 가을까지 이어진다. 꽃차례의 빛깔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꽃 모양을 유지한 채 여름을 난다.
이유가 있다. 사실 우리가 수국의 꽃이라고 부르는 부분, 특히 꽃잎으로 여기는 부분은 꽃이 아니다. 수국 꽃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화려한 부분이 꽃잎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수국의 꽃에는 꽃잎이 없다. 꽃잎처럼 보이는 부분의 안쪽에 가늘고 작게 돋아난 꽃술들만으로 꽃의 형태를 갖췄다. 꽃잎이 없는 못갖춘꽃이다. 만일 꽃잎처럼 보이는 부분이 없다면 벌과 나비의 눈에 뜨이지 않기 때문에 수정을 이루기 어렵다.
수국은 특단의 대책을 마련했다. 꽃잎 대신 꽃잎 못잖게 화려한 조직을 만들어 낸 건 그래서다. 어쩌면 처음에는 꽃을 도드라지게 보이려고 여러 꽃송이를 모여 피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힘에 부쳤다. 그러자 수국은 자디잔 꽃 곁에 다른 꽃의 꽃잎과 비슷한 조직을 만들어 냈다. 꽃처럼 생겼지만 꽃이 아니라는 뜻에서 ‘헛꽃’이라고도 부르는 특별한 기관이다. 식물학에서는 포(苞)라고 부른다.
포가 꽃잎과 다른 차이는 생존 기간에 있다. 세상의 모든 꽃은 자신만의 존재 이유, 즉 꽃가루의 수정을 이룬 뒤에 시들고 낙화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포는 꽃잎이 아닌 까닭에 수정을 이루었다고 해서 시들어야 할 까닭이 없다. 그래서 수국 꽃은 수정을 마친 뒤까지 남아 있어도 괜찮다. 그러니까 늦여름까지 남아있는 건 진짜 꽃이 아니라 헛꽃이었다.
헛꽃으로 벌·나비를 끌어들여 수국은 수정을 이뤘다. 고마움의 뜻으로 수국은 벌·나비에게 꽃밥과 꿀을 제공했다. 여느 꽃처럼 많은 양은 아니라 해도 벌·나비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을 건넸다. 목적을 이룬 꽃은 시들어 떨어질 차례다. 그러나 헛꽃은 꽃이 아니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이 즈음에 헛꽃을 꽃으로 착각하고 찾아들 배고픈 벌·나비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국으로서는 벌·나비에게 줄 아무것도 없다. 미안한 일이다. 수국은 그래서 자신이 이미 수정을 마쳤으며 꿀도 꽃가루도 남지 않았다는 뚜렷한 표시를 한다. 바로 ‘뒤집기 신공’이다.
‘뒤집기 신공’은 수국 종류 가운데 특히 산수국 종류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헛꽃을 꽃차례 가장자리에 피우고 벌·나비를 끌어들였던 산수국 꽃은 놀랍게도 주변의 모든 헛꽃을 백팔십도 뒤집는다. 벌·나비에게 오지 말라는 뚜렷한 표시다. 얼핏 보아서는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렵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그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벌·나비의 눈에는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차이다. 아무 대가도 없는 노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수국 꽃이 벌·나비를 향해 펼치는 신비로운 배려다.
나무, 그 가운데에도 꽃을 피우는 현화식물은 꽃가루받이를 매개하는 곤충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나무는 일방적으로 곤충의 도움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무는 곤충의 노동에 따른 분명한 대가를 제공할 뿐 아니라, 곤충의 헛수고를 강요하지 않는다. 나무와 곤충이 오랜 세월 동안 이 숲, 이 땅에 조화롭게 더불어 살아온 지혜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배려와 양보는 이 땅에 더불어 살아가는 중요한 지혜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양보와 배려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좇으며 살아간다. 주변을 돌아볼 만큼의 짬을 얻지 못한 탓이다. 우리 사는 세상이 평화로울 수 없는 까닭이다. 양보와 배려. 이 땅에 더 풍요로운 평화를 일구기 위해서 반드시 회복해야 할 생명의 지혜이자 참 삶의 진리다. <나무 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유가 있다. 사실 우리가 수국의 꽃이라고 부르는 부분, 특히 꽃잎으로 여기는 부분은 꽃이 아니다. 수국 꽃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화려한 부분이 꽃잎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수국의 꽃에는 꽃잎이 없다. 꽃잎처럼 보이는 부분의 안쪽에 가늘고 작게 돋아난 꽃술들만으로 꽃의 형태를 갖췄다. 꽃잎이 없는 못갖춘꽃이다. 만일 꽃잎처럼 보이는 부분이 없다면 벌과 나비의 눈에 뜨이지 않기 때문에 수정을 이루기 어렵다.
헛꽃으로 벌·나비를 끌어들여 수국은 수정을 이뤘다. 고마움의 뜻으로 수국은 벌·나비에게 꽃밥과 꿀을 제공했다. 여느 꽃처럼 많은 양은 아니라 해도 벌·나비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을 건넸다. 목적을 이룬 꽃은 시들어 떨어질 차례다. 그러나 헛꽃은 꽃이 아니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이 즈음에 헛꽃을 꽃으로 착각하고 찾아들 배고픈 벌·나비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국으로서는 벌·나비에게 줄 아무것도 없다. 미안한 일이다. 수국은 그래서 자신이 이미 수정을 마쳤으며 꿀도 꽃가루도 남지 않았다는 뚜렷한 표시를 한다. 바로 ‘뒤집기 신공’이다.
‘뒤집기 신공’은 수국 종류 가운데 특히 산수국 종류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헛꽃을 꽃차례 가장자리에 피우고 벌·나비를 끌어들였던 산수국 꽃은 놀랍게도 주변의 모든 헛꽃을 백팔십도 뒤집는다. 벌·나비에게 오지 말라는 뚜렷한 표시다. 얼핏 보아서는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렵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그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벌·나비의 눈에는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차이다. 아무 대가도 없는 노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수국 꽃이 벌·나비를 향해 펼치는 신비로운 배려다.
나무, 그 가운데에도 꽃을 피우는 현화식물은 꽃가루받이를 매개하는 곤충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나무는 일방적으로 곤충의 도움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무는 곤충의 노동에 따른 분명한 대가를 제공할 뿐 아니라, 곤충의 헛수고를 강요하지 않는다. 나무와 곤충이 오랜 세월 동안 이 숲, 이 땅에 조화롭게 더불어 살아온 지혜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배려와 양보는 이 땅에 더불어 살아가는 중요한 지혜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양보와 배려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좇으며 살아간다. 주변을 돌아볼 만큼의 짬을 얻지 못한 탓이다. 우리 사는 세상이 평화로울 수 없는 까닭이다. 양보와 배려. 이 땅에 더 풍요로운 평화를 일구기 위해서 반드시 회복해야 할 생명의 지혜이자 참 삶의 진리다.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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