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스피릿’(Spirit)은 정신·영혼·태도 등 약간은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가진 명사다. 이 명사가 가진 뜻밖의 의미가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은 바로 증류주 즉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말한다. 위스키·코냑과 브랜디·보드카 등이 모두 스피릿의 범주에 들어간다.

이 술들은 단지 마시고 취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서구 사회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지식인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인문학의 영역을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연구하는 모든 학문으로 정의했을 때, 스피릿은 인간의 본질과 관계의 깊이를 이해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매개체였다. 그래서 서구 사람들은 증류주를 정신·영혼·태도와 같은 의미로 정의했다.

역사와 학문과 술에 관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중국이 여기에서 빠질 턱이 없다. 위스키·브랜디·보드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혹은 그보다 한 수 위에 있는 중국의 스피릿은 ‘바이주’(白酒)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빼갈, 고량주, 이과주, 공부가주’ 등등 재료와 브랜드를 혼동해서 마구 부르며 마셨던 그 모든 술들의 총칭이자 공식 명칭이 바로 바이주다.

최근 바이주 시장에 새로운 흐름이 감지된다. 중국 8대 명주 또는 10대 명주라는 명성을 등에 업고 고가의 프리미엄 브랜드 술이 점차 인기를 끌고 있다. 넒은 중국 대륙에서 오랜 역사를 거치며 만들어진 고가의 술이니 맛있는 것은 당연할 터. 그렇게 마시면서도 끝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중국 쓰촨성 루저우시를 찾았다. 쓰촨성의 성도 청두시에서 자동차를 이용해 남쪽으로 세 시간을 더 달려야 루저우시에 닿는다. 이곳은 도심의 초입에서부터 ‘중국술의 고향’임을 당당히 밝힌다. 그럴 만한 게, 등록된 루저우시의 인구는 505만 명. 2015년 기준 지역총생산액(GRDP)은 1353억 위안(약 23조 원), 이 가운데 주류 산업의 영업 총액은 724억 위안으로 지역총생산액의 절반을 넘는다. 이러니 지역 전체가 주류 산업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결과가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북위 28도에 위치한 루저우는 중국 대륙에서 가장 긴 강인 양쯔강(장강)이 지난다. 습하고 더운 여름이 길게 이어진다. 대신 겨울은 흐린 날이 많고 음습하다. 이런 환경 탓에 일찍부터 발효 문화가 발달했다.

발효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바로 바이주다. 중국에는 총 4500여 종의 술이 있고 그 가운데 여덟 개를 ‘중국 8대 명주’로 꼽는데 루저우와 그 인근 지역에서 마오타이·우량예·루저루라오자오 등 세 개의 명주가 생산되고 있다. 자타가 공인할 만한 중국술의 고향인 셈이다. 더불어 이곳에서는 덥고 습한 날씨를 이기기 위해 매운 음식이 발달했다. 말린 고추와 초피나무 알갱이인 화자오를 듬뿍 넣은 쓰촨 음식은 단지 매운 것을 넘어 혀끝이 마비될 정도로 강렬하다. 하지만 그 강렬함에 익숙해지면 날씨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느껴진다. 오죽하면 ‘다른 지역 사람들은 매운 것을 두려워하지만, 쓰촨 사람들은 맵지 않을까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신기한 것은 매워서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혀가 얼얼해 정신이 혼미할 정도임에도 바이주 한 잔만 마시면 평정심을 되찾고 모든 것이 오히려 개운해진다는 사실이다. 술과 음식은 상호 보완 관계임을 여실히 증명한다.

루저우에서 가장 비싼 명주로 평가받는 ‘궈자오1573’을 빚는 양조장을 찾았다. 중국에서 ‘자오’는 술을 빚는 구덩이를 말한다. ‘궈자오1573’을 빚는 양조장에는 총 40여 개의 자오가 있는데 그 가운데 4개 구덩이는 1573년부터 무려 445년 동안 술을 빚어 온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구덩이다. 그러니까 ‘궈자오1573’은 브랜드이자 존재 그 자체로 중국술의 역사를 대변한다. 그래서 네 개의 구덩이 앞에는 엄청난 크기의 검은 벽에 중국 국가 유적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자오라는 술 구덩이에 들어가는 재료는 숙성시킨 수수와 쌀겨 그리고 누룩이 전부다. 이렇게 구덩이를 채우고 강에서 퇴적된 고운 황토로 마치 봉분을 쌓듯 밀봉을 하는 것으로 양조 작업은 끝. 그리고 6개월을 기다린 다음 대형 가마솥에 넣고 쪄 내면 맑고 투명하지만 강렬한 바이주가 술술 나온다. 내가 그토록 오랜 시간 가졌던 의문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소주를 만드는 청주나 위스키를 만드는 맥주 등은 모두 물이 있어야 술이 만들어진다. 심지어 물을 사용하지 않는 와인조차 포도가 가진 수분을 이용한다. 적당량의 알코올을 가진 발효주를 증류해야 비로소 도수가 높은 증류주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바이주를 발효하는 과정에는 일체의 물이 사용되지 않는다. 마치 두엄 더미를 연상시킨다. 6개월이 지나 이 두엄 더미를 깨 보면 바이주에서 나던 꽃향기와 과일 향기가 진동한다.

발효와 부패의 절묘한 경계, 혹은 부패 직전에 얻는 가장 향기로운 순간. 중국술은 수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 썩은 구덩이 속에서 무엇보다 맑고 향기로운 술을 찾아낸 것이다. 루저우시에만 이런 구덩이가 1만여 개가 넘고, 그 가운데 1100여 개는 술을 빚은 지 100년이 넘는다고 한다. 가장 원형에 가깝지만 가장 완벽한 양조법. 중국술의 매력과 저력은 이토록 단순한 원리와 전통을 우직하게 지켜 낸 끈기에 있었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