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 <135> 명장 가서한
2018년 06월 05일(화) 00:00 가가
투르크족 출신…안녹산에 져 처형
가서한(哥舒翰, ?~757)은 투르크족 가서부 출신으로 토번전에서 여러번 공을 세웠다. 안녹산의 난때 동관을 지키다가 패해 낙양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안서(安西) 지방에 살았다. 40세 전후로 하서절도사 왕충사의 휘하 무장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747년 왕충사의 명을 받아 토번 공략의 책임을 맡았는데 휘하의 부장이 거만하게 굴자 채찍으로 때려 살해하니 군졸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여러 차례 공을 세워 농우절도부사가 되었다. 매년 보리가 익을 때면 토번군이 와 약탈해 갔는데 그가 부임하자 두려워 감히 약탈행위를 하지 못하였다. 왕충사가 재상 이임보의 모함으로 투옥되자 농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왕충사가 국문을 받자 주변 사람들이 재물을 써 구제토록 권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만약 바른 도가 아직도 있다면 왕공은 반드시 억울하게 죽지 않을 것이며, 만일 장차 그가 죽게 될 것이라면 많은 뇌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749년 6만여 군대를 이끌고 청해성 황원현의 석보성을 공격했다. 3면이 험한 절벽으로 쌓여 성으로 오르는데 오직 한 길 밖에 없었다. 오랜기간 공략에 나서 결국 성을 함락시켰다. 황제가 양귀비를 총애해 친척오빠인 양국충을 중용하였다. 그는 양국충과 힘을 합쳐 이임보의 권력을 견제하였다. 범양절도사 안녹산에 대한 황제의 신임이 커졌는데 황제는 그들이 가깝게 지내기를 희망했다. 안녹산이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는 호족이고 어머니는 돌궐족인데 공의 아버지는 돌궐족이고 어머니는 호족이다. 종족이 그와 같으니 어찌 친할 수 없겠는가?” 그가 답하였다. “열사람이 말하기를 여유가 굴을 향해 짖으면 불길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고향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저에게 친함을 보이면 제가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안녹산이 대노해 둘 사이의 원한이 깊어졌다. 재상 양국충은 안녹산을 견제하려고 그에게 하서절도사를 겸직토록 하고 서평군왕의 작위를 내리도록 하였다.
풍질을 앓고 장안에 은퇴하였는데 755년 안녹산이 거병했다. 낙양을 돌파하고 장안을 향해 서진하자 현종은 그를 불러 병마부원수를 제수해 병사 8만을 거느리고 토벌토록 하였다. 병이 들어 일을 처리할 수 없어 행군사마 전량구에게 모든 군정을 위임하였다. 전량구는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왕사례가 기병을 이승관이 보병을 맡도록 하니 군대가 하나로 통일되지 못했다. 장군 고선지와 봉상청이 낙양성 방어에 실패한 후 동관으로 옮겨 방어전을 폈는데 환관 변령성이 황제에게 왜곡 보고해 둘이 참수되고 그가 전권을 위임받았다. 안녹산의 아들 안경서가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쳤다. 호부상서 안사순과 사이가 나빴는데 안녹산과 서로 내통한 것처럼 거짓 보고해 처벌토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재상 양국충과 사이가 틀어졌다.
그는 동관이 천하의 요새라는 점을 활용해 굳건히 지키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양국충의 측근이 “지금 조정의 군대는 모두 가서한의 수중에 있는데 그가 마음을 달리하면 공이 위태롭지 않겠습니까.”라고 고자질했다. 가서한의 군권을 두려워하던 양국충은 황제에게 동관을 지키지만 말고 낙양을 회복토록 주청하였다. 그가 주문을 올려 “적은 먼 곳에서 왔기 때문에 신속히 싸우는 것을 이익으로 알고 있으며, 관군은 험준한 곳을 점거해 그들을 누르니, 굳게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징발된 군사가 아직도 모이지 않았으니 청컨대 기다리십시오.” 양국충이 역적들이 방비가 없는데 가서한이 지체하면 장차 기회를 잃게 된다고 주장했다. 황제가 그렇다고 생각해 사신을 파견해 싸울 것을 재촉했다. 통곡하고 군사를 이끌고 동관을 나갔다. 결국 안녹산군에 대패하고 낙양으로 압송되었다. 안녹산은 이광필, 노경 등 장군들에게 편지를 써 회유토록 하였다. 그러나 제장들은 회답하는 서한에서 그의 불충을 나무랐다. 안녹산은 효과가 없음을 알자 그를 감금하였다. 757년 관군의 공격을 받아 낙양을 지키던 안경서가 하북으로 달아났는데 당의 장수인 가서한과 정천노 등 30여명을 죽였다. 명장의 허무한 최후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안서(安西) 지방에 살았다. 40세 전후로 하서절도사 왕충사의 휘하 무장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747년 왕충사의 명을 받아 토번 공략의 책임을 맡았는데 휘하의 부장이 거만하게 굴자 채찍으로 때려 살해하니 군졸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여러 차례 공을 세워 농우절도부사가 되었다. 매년 보리가 익을 때면 토번군이 와 약탈해 갔는데 그가 부임하자 두려워 감히 약탈행위를 하지 못하였다. 왕충사가 재상 이임보의 모함으로 투옥되자 농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왕충사가 국문을 받자 주변 사람들이 재물을 써 구제토록 권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만약 바른 도가 아직도 있다면 왕공은 반드시 억울하게 죽지 않을 것이며, 만일 장차 그가 죽게 될 것이라면 많은 뇌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