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팬의 성격이나 성향이야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할 것이다. 나는 평소에 그저 나와 같은 팀을 응원하는 야구팬과 아닌 야구팬 이렇게 둘로 나눌 뿐이지만, 특정 팀이 아닌 야구를 대하는 태도나 관점을 기준으로 두자면 다음 분류가 꽤 그럴듯할 것이다. 어둠의 야구팬과 빛의 야구팬. 부정의 야구팬과 긍정의 야구팬. ‘역레발’의 야구팬과 설레발의 야구팬.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가? 나의 경우를 먼저 고백하자면, 빛보다는 어둠에 가까운 것 같다. 설레발보다는 괜한 걱정이 더 어울리고, 긍정보다는 부정할 때 에너지가 더 커진다. 환호보다는 탄식에 친연성을 느끼며 승리의 기운보다 패배의 참혹에 더 영향을 받는 사람이다.

필자와 같은 어둠의 야구팬이 보이는 만성적인 불안 증세는 다음과 같다. 늘 질 것만 같고 위기에는 실점할 것 같으며 기회는 무산될 것 같은 예감. 정규 시즌에는 가을 야구에 탈락할 것만 같고, 가을 야구에 진출하면 첫 번째 시리즈에서 탈락할 것만 같은 느낌. 잘했던 플레이는 금세 잊히지만 본헤드 플레이는 몇 년이고 잊지 않는 편향된 기억력. 이를 두고 야구팬의 용어로 ‘역레발’이라고 하는데 이는 약간 주술적인 의미도 있다. 패배할 게임을 승리로 바꾸는 정도의 진짜 주술은 아니고, 닥쳐 올 패배에 상처받을 자기 자신을 미리 잽싸게 위로하는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시즌 초 KIA의 경기력은 어둠의 팬 내면에 깃든 ‘암흑의 핵심’(조셉 콘라드의 소설 제목)을 건드리는 모양새다.

직전 시즌 우승을 만끽한 선수들에게 올해 각오를 물으면 이런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작년 우승은 모두 잊었습니다.” 터트린 샴페인은 잊고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다짐이겠지만, 최근 KIA 타이거즈의 야구는 저 말이 말 그대로 우승할 때의 경기력을 ‘망각’하겠다는 망설로 들리게 한다. 불안한 뒷문은 여전한데, 타자와 선발 투수의 지표는 거의 전 부분에서 작년에 비해 한참이나 뒤처진다. 탄탄했던 수비는 어딘지 삐걱거리고 엉성하다. 4월 18일 현재 성적은 승과 패가 같은 5할 승률. 반이나 이긴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의 경기력인데, 남은 봄과 다가올 여름은 어쩌나, 걱정이 앞선다.

프로 야구의 한 시절을 지배한 강팀을 두고 흔히 ‘왕조’라고 하는데, 40년이 다 되어 가는 역사를 지녔지만 KBO에서 왕조라 불린 팀은 80∼90년대 해태, 2000년대 현대와 SK, 2010년대 삼성 정도다.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하고 그중 통합 우승(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를 동시에 우승하는 것)은 덤이며 설사 우승에 실패하더라도 한국 시리즈에는 진출하는 팀. 최근에는 두산 정도가 그에 근접한 팀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팀을 꺾고 우승한 팀이 KIA인데, 올해 초반에는 플레이가 작년만 못한 것이다. 2009년에도 당시 김성근 감독을 중심으로 건실한 왕조를 꿈꾸던 SK를 누르고 우승했었다. 이윽고 다음 시즌에 KIA는 거짓말 같은 연속 패배 행진을 하는데…. 그렇다. KIA팬 내면에 똬리를 튼 암흑의 핵심은, 2010년 16연패다. 그리고 이 말을 감히 내뱉는 것은 나의 설레발, 아니 ‘역레발’이다.

엊그제 17일 경기에서 9회 초 실책에 의한 실점으로 동점이 됐을 때도, 5연패라는 숫자가 아른거리며 다시 암흑의 핵심이 꿈틀거렸다. 다행히 다음 공격에 상대방 실책과 김주찬의 활약으로 연패를 끝낼 수 있었지만, 어째서 작년과 같은 시원한 승리를 하지 못할까, 찜찜함은 남았다. 왜 이겨도 그러느냐고? 나는 어둠의 야구팬이니까. 부정성의 팬이니까. 어차피 상처 입을 나를 내가 먼저 위로하고 싶어서.

내가 아는 또 다른 KIA팬은 빛의 야구팬이고 긍정의 화신이다. 그의 내면에는 나와 달리 ‘광휘의 속삭임’(정현종의 시집 제목) 같은 게 있는데, 어처구니없는 역전패를 당한 날에도 “괜찮아, 내일 이기면 되니까” 하며 소주를 꼴딱 삼키는 것이다. 그 팬의 빛은 팀의 모든 곳을 비춘다. 유망주의 가능성은 이제 만개할 것이고 베테랑의 전성기는 이제 시작이다. 강속구 투수는 제구만 잡으면 최고가 되고 실책이 잦은 선수는 반복 훈련으로 약점을 극복할 것이다. 연패가 있으면 연승이 있는 법이며 좋지 않은 경기력이라도 이겼으면 그것으로 다행이고, 잘하다 삐끗해서 지면 내용은 괜찮았으니 그것대로 다행인 사람이다.

그에게 올 시즌 초반 KIA의 행보는 본격적인 여름 순위 다툼을 앞두고 숨을 고르는 과정에 불과한 것 같다. 이러다 여름이나 올스타 휴식기 이후가 승부처라 할 것이고, 그것도 지나면 잔여 경기 일정과 결과가 중요하다 할 사람이다. 그것이 빛의 야구팬이 야구를 즐기는 방법이다. 그의 광휘의 속삭임은 왕조 시절의 전국구 스타들의 활약에 있다. 이종범과 선동열을 입에 올릴 때는, 빛나던 그 시절 그들에게 받았던 유년의 위로로 이미 충분하다는 표정이다.

오늘 경기를 앞두고도 우리 둘은 메신저로 설레발과 역레발을 주고받았다. 상대방 투수는 외국인 에이스. 그는 우리 팀이 전통적으로 외국인 에이스에게 강하다고 말하고, 나는 우리 팀이 전통적으로 낯선 투수에게 고전한다고 말한다. 어느 전통이 진짜 전통인가? 둘 다 가짜이며 동시에 진짜이겠지만, 야구장은 빛과 어둠이 섞이는 해 질 녘에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은 잘 안다. 빛의 팬과 어둠의 팬이 야구장 혹은 중계 화면 앞에서 뒤섞이고 있다.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한 야구 사랑의 방식으로.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