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책방 도시 아이콘이 되다]〈2〉 시집 전문서점 ‘위트 앤 시니컬’
2017년 10월 16일(월) 00:00
양지로 나온 詩 가득 詩 마니아들의 '성지'

위트 앤 시니컬이 운영하는 ‘낭독회’와 ‘두시간 클럽’은 독자들이 일상으로 부터 벗어나 온전히 시(詩)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한 차별화된 기획이다. 〈사진제공·위트 앤 시니컬〉

유명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잘 나가던 유희경(37·사진)씨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미래에 회의감이 들었다. 대학졸업 후 10년 동안 좋은 책을 만드는 데 만족해왔지만 ‘언제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에서다. 특히 종종 독자를 위해 책을 만들기 보다는 수익을 내기 위해 책을 펴내야 할 때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의 천직이라고 여겼던 ‘출판쟁이’의 삶이 심드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 망막박리라는 진단을 받게 됐다. 수많은 원고를 들여다 봐야 하는 편집자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눈을 혹사하지 않으면서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그는 시의 즐거움을 나누는 공간을 꿈꿨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7월1일 서울 신촌기차역 건너편 건물 3층에 국내 최초의 시집 전문서점 ‘위트 앤 시니컬’(wit n cynical)을 열었다.

지난 주 취재차 방문한 ‘위트 앤 시니컬’은 조금 독특했다. 1층 건물이나 지하에 자리하고 있는 여느 동네 책방과 달리 모던한 건물의 숍인숍(shop in shop)이었다. 50평 규모의 매장을 커피점, 셀렉트숍과 공유하고 있는, 말하자면 ‘한 지붕 세 가족’이었다.

처음 책방을 오픈할 때만 해도 그는 6개월만 ‘버티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소설도 아니고 시집만 판매해선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에서 였다. 하지만 서점은 큰 수익은 내지 못하지만 보란 듯이 1년 3개월 동안 운영되고 있다. 한 달 평균 1000여 권의 시집이 팔릴 정도로 방문객들의 발길이 꾸준하다.

“아마도 거기에는 독특한 서점 이름도 한몫하는 것 같아요.(웃음) ‘위트 앤 시니컬’이라는 명칭은 지인들과의 사석에서 우연히 건져낸 거예요. ‘위트있는 시인’이라는 말을 한 친구가 ‘위트와 시니컬’로 잘못 알아 들어 박장대소했는 데 대뜸 누군가 시집이름으로 어떠냐고 하더군요. ‘시(詩)만큼 재치와 냉소가 어우러진 장르가 있을까’싶어 서점 이름으로 제격이다 생각했죠.”

하지만 서점이 독자들의 호응을 받고 있는 건 책방지기의 남다른 안목과 마케팅 때문이다. 온라인 서점이나 대형서점에서 ‘빛을 보지 못하는’ 좋은 시와 시집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시와 친근해지도록 지속적인 기획을 펴오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유씨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시와 희곡을 전공한 후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분에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가 당선된 시인이다. 작품집으로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를 출간했고 ‘2011년 올해의 젊은 시인상’을 수상했다.

그래서인지 ‘위트 앤 시니컬’에는 누구나 다 아는 스타시인들의 시집은 찾아 보기 힘들다. 대신 문학과지성 시인선 1번인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부터 2002년 요절한 시인 여림의 유고전집까지 1500여 권의 시집이 서가를 채우고 있다. 또한 김소연, 허 연, 안태운, 유계영, 박세미, 박준 등 젊은 작가들의 시집이 주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형서점에서는 구석에나 처박혀(?) 있을 시집들이 이곳에선 방문객들의 시선을 받기 쉬운 중앙에 진열된다. 좋은 시의 재발견, 그가 독자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솔직히 잘 만 하면 시집 서점이 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처음엔 지인들이 ‘시를 읽지 않는 시대에 무슨 시집 서점이냐’며 우려했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10년 동안 출판사에서 일하는 동안 익힌 ‘촉’으로는 시를 즐기는 고정 독자층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한 시인이 시집 1권을 내면 기본적으로 2000권 정도 팔릴 만큼 팬층이 형성돼 있어요. 대부분의 독자가 20∼30대 여성이라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요.”

8평 규모의 서점에서 시선을 끄는 건 한쪽 벽면에 진열돼 있는 ‘오늘의 서가’. 문학성이 출중한 시, 문학과지성사, 창비 등 유명출판사에서 검증해 출간한 시인선 시리즈, 작품성은 있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시집들이 그의 손에서 새롭게 ‘부활’한다. 말하자면 순전히 그의 안목에 의해 빛을 본 행운아들인 셈이다.

뭐니뭐니해도 ‘위트 앤 시니컬’에서만 접할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은 시를 읽는 사람들이다. 수다를 떨거나 노트북을 펼치고 인터넷 서핑을 하는 요즘 카페들의 익숙한 모습과는 다르다. 이 곳에 들른 고객들은 커피나 차를 마시며 시의 향연에 빠진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시에 몰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낭독회와 ‘두시간 클럽’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부터 달라졌다. 하지만 여느 낭독회와는 조금 다르다. 일단 2만원의 참가비를 내야하고 선착순 40명만 입장할 수 있다. 그 대신 독자들은 따뜻한 커피와 시집 1권을 선물로 받는다. 지금까지 23회의 낭독회 가운데 1∼2회를 빼곤 매진사례를 기록했다.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낭독회는 작품에 집중하기 보다는 홍보 이벤트로 가는 경우가 많아요. 저자를 ‘띄워서’ 시집의 인지도를 높여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서죠. 하지만 저는 정반대로 철저히 ‘시’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어요. 저자가 직접 등장해 5편의 작품을 읽은 다음 몇마디 코멘트를 하고 다시 시를 읊는 거죠. 처음엔 독자들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주저했던 저자들도 막상 낭독회에 참가한 뒤에는 오히려 시만 읽으시더라구요. 낭독의 매력에 빠진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에 압도된 거죠. ”

낭독회의 ‘마법’이 입소문을 타면서 대전은 물론 부산과 광주, 심지어 미국에서 참가신청을 하는 열혈팬도 생겼다. 시 마니아들 사이에선 ‘성지순례’로 불릴 정도다. 시 읽기의 즐거움을 알리고 싶었던 유씨의 바람은 일단 성공한 셈이다.

서점이 내놓은 또 하나의 기획은 ‘두시간 클럽’. 시집을 차분하게 읽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서점을 제공하는 책방지기의 배려다. 그가 하는 일은 두 시간 동안 참가자들의 스마트폰 기기를 보관하고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책 읽는 시간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있는 세태여서인지 매번 서점이 가득 찰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취재를 마칠 무렵, 서점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잠시 자리를 뜬 그가 돌아와 내게 전한다. “‘이병률 시인의 낭독회에 참가를 신청한 독자인데 부득히 그날 일정이 생겼대요. 참가비 2만원을 환불해주겠다고 하자 혹시 자기 대신 낭독회에 오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선물해달라고 고사하네요.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렇습니다.(웃음)”

/서울=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사진=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 이 시리즈는 삼성언론재단의 기획취재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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