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4월 제 20대 총선 승부처는 단연 호남이 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변수도 많겠지만 현재 정국 흐름을 놓고 보았을 때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근거는‘호남 맹주’ 부재 상황에 있다. 지금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 호남 표의 향배에 총선 판세가 요동칠 것이라는 관측이다. 상대적으로 영남이나 충청 표는 비교적 흔들림이 없다.

아직 호남엔 새정치민주연합이 있지 않으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막상 선거판이 벌어지면 기존의 관성을 되찾을 것이라는 진단도 있다. 하지만, 이젠 예전의 호남 텃밭이 아니다.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의 지지율이 5%까지 떨어지면서 한때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에게도 지지도가 뒤진 것은 분명 쇼크다. 호남이 새정치연합의 본산인지를 의심케 한다. 해병전우회·고대동문회와 함께 강한 결속력을 자랑한다는 수도권의 호남향우회도 술렁거린다고 한다.

우리나라 유권자, 그 중에서 유독 호남민들은 투표 때마다 ‘감동’을 좇는다. 하지만 단순한 기분 풀이나 부화뇌동은 아니다. 대의와 명분을 지니고 심금을 울리는 후보가 나타나면 화끈하게 밀어주는 것이다.

지난 2002년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을 돌이켜보자. 당시 광주 경선에서 신안 출신 한화갑이 부산 출신 노무현에게 패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한화갑을 내세웠다간 ‘호남 고립론’에 말려 필패하리라 내다보고 노무현을 전략적으로 선택했다는 해석이 많다.

그러나 결코 흉내 내기 어려운 노무현의 정치 역정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속된 말로 노무현은 호남인의 ‘간’에 딱 맞았다. 그는 1990년 3당 합당이 이뤄지자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부도덕한 야합’이라며 1988년 그를 정치에 입문시켰던 ‘스승’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결별하고서.

이어 1992년 14대 총선(부산 동)과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열세를 무릅쓰고 출마했으나 지역감정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원외를 맴돌다 1998년 서울 종로 국회의원 보선에서 당선된 후 2000년 총선 때 또다시 부산 북·강서을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나섰지만 결과는 ‘당연히’ 낙선이었다.

지역주의 제물이 될 줄 뻔히 알면서도 몇 번씩이나 몸을 내던진 그는 ‘바보’가 됐다. 하지만 그의 패배는 훗날 대통령을 잉태했다. 호남인들은 고비 때마다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을지라도) 사지로 뛰어들었던 노무현을 ‘짠하게’ 여기고 열광했다. 노무현은 ‘사즉생’(死卽生)을 실천했고, 호남인들은 그를 환생시켜 주었다.

그렇다면, 지난 18대 대선에서 문재인에게 몰아줬던 호남 표심은 지금 왜 이토록 싸늘해졌는가? 올 2·8 전대 이후 새정치연합의 분란과 호남의 지지 철회는 ‘물에 물 탄 것 같은’ 그의 리더십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불구덩이에서 몸을 살랐던 ‘노무현 정치’의 짜릿함에 매료됐던 호남인들이 뜨뜻미지근한 문재인에게 마음을 내주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 덩달아 당내 친노-비노 갈등까지 겹치니 호남민들이 등을 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최근 문 대표가 광주에서 내놓은 ‘문(재인)-안(철수)-박(원순)’ 연대 제의는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다. 문(부산)-안(부산)-박(창녕)의 출신 지역이 모두 경상도이다 보니 “영남 패권으로 다 해먹겠다는 것이냐”는 불평이 나올 법도 하다. 혹시나 하고 귀를 세웠던 호남인들의 울화통만 건드렸다. 안철수는 엉거주춤이고, 현직인 박원순 서울시장은 선거법 위반 시비에 몸을 사려 또 하나의 패착이 됐다. 언 발에 오줌 누기가 되고 만 것은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한 탓이다.

물론 문 대표의 심정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통 크게 비우지 못하는 건 냉혹한 정치 현실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물러나면 더 큰 혼란이 올 것이고 살얼음 정치판에서 자신의 존재마저 사라질 것이라는 걱정이 앞설 수 있다.

어찌 됐든 이제 문 대표가 텃밭 민심을 되돌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해 보인다. 천정배-박주선-박준영 등 호남 출신 신당파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당내 비주류의 폭발도 임계점에 다다랐다. 문 대표의 급선무는 호남 표심을 반전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빨리 깨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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