껴안고 뒹굴며 맘껏 소리 질러 봐
2015년 10월 30일(금) 00:00 가가
* 신라의 헌안왕은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어느 날 왕은 이제 열다섯 살이 된 한 소년을 불러 묻는다. “선인(善人)을 본 적이 있는가?” “예. 세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귀인으로서 겸손한 자, 부자로서 검소한 자, 세력가로서 교만하지 않은 자입니다.”
왕이 감복해서 그를 사위로 삼는데, 이렇게 해서 훗날 왕이 된 이가 바로 신라 48대 경문왕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주인공이 바로 그다. 왕의 두건을 만들던 장인(匠人)이 죽기 전에야 대나무 숲속에 들어가,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외쳤다는 이야기.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 전해 온다.
*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 임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정(情) 나눈 오늘 밤 더디 새오시라” 고려가요 ‘만전춘’(滿殿春)의 첫 구절이다. 설사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차가운 얼음 위에 댓잎(대나무 이파리) 깔고 누워 함께 뒹굴고 싶단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남녀의 정념(情念) 아닌가. 극한의 추위 속에서도 임과 함께라면 밤이 새는 것이 안타까울지니. 참으로 용광로처럼 뜨거운 사랑 노래라 하겠다.
* 두리번두리번, 둑방길을 걸으며 매표소를 찾는데 우선 송수권의 시(‘대숲 바람소리’)가 눈에 띈다.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 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물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한 발짝 걸음을 뗄 때마다 시 한 수씩을 감상한다. 대부분 대나무와 관련된 시들이다. 대나무를 주제로 한 세계 최초의 박람회인 ‘2015 담양 세계대나무박람회’가 이곳 관방제 부근에서 열리고 있는 것이다.
관방제(官防提)는 관에서 쌓은 제방이란 뜻이다. 국수 한 그릇 먹으러 왔다 훌쩍 떠나곤 할 때는 무심히 지나쳤던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1648년 담양 부사(府使) 성이성(成以性)이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는 관방제 조성의 유래가 적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 바로 이 담양 부사였다”라는 설명이다. 언젠가 연세대 국문과 설성경 교수가 주장했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어찌 됐든 관방제를 조성한 성 부사는 아버지가 남원 부사를 지낼 때 남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후 호남 지역 암행어사가 된 적이 있는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 관방제 다리를 건너 종합 안내소에서 관람 동선을 물은 뒤, 대나무박람회를 둘러본다. 전시관에 들어서니 한쪽에 집채만 한 커다란 전구가 있다. 대나무를 전구의 필라멘트로 사용해 실험에 성공했다는 에디슨의 이야기다. 기업관·국제관에는 대나무로 만든 다양한 제품이 전시돼 있다. 대나무의 쓰임새가 이렇게도 많았던가.
감을 딸 때 썼던 간짓대, 빨랫줄을 받치는 바지랑대, 고운 머리 찰찰히 빗어 내리는 참빗…. 이처럼 예전에도 우리 일상생활 속에 긴요했던 대나무는, 때로는 악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일찍이 소설가 김훈도 그의 산문 ‘악기의 숲, 무기의 숲’에서 이를 말한 적이 있다. 죽창과 피리다.
그러고 보니 대나무를 말하면서 ‘대나무 피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인 만파식적(萬波息笛). 죽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는데, 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적의 군사는 물러가고, 병은 낫고, 물결은 평온해졌다고 한다. 역시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다.
* 친환경농업관을 천천히 걷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뱀처럼 길고 구불구불한 뱀오이, 마치 달걀 모양을 한 흰색 달걀가지…. 각종 기묘한 식물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전시장 주변 곳곳에는 대나무 아이스크림, 대나무 엿, 댓잎 식혜 등 다양한 먹을거리도 널려 있다.
* 북적거리는 인파 속을 빠져 나와 ‘지붕 없는 전시관’인 죽녹원의 돌계단을 오른다. 하늘 높이 죽죽 뻗은 대나무 숲길의 고요함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대나무는 편백나무보다 훨씬 더 많은 피톤치드를 내뿜는다고 하니, 이내 마음이 안온(安穩)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몇 걸음 채 옮기지 않아 ‘이이남 아트센터’가 보인다. ‘움직이는 그림’ 등 작가 특유의 예술세계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것도 소소한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아트센터 바로 아래에는 인간문화재인 채상장(彩箱匠) 서신정 씨의 작품이 전시된 건물이 있다. 대나무 껍질을 가늘고 얇게 만든 대오리에, 여러 가지 색깔을 들여 가로세로로 엮어 만든, 죽세공예품의 정수(精髓)가 바로 채상(彩箱:채색한 무늬를 넣어 만든 대나무 상자) 아니던가.
* 죽녹원 뒷길로 빠져 벽화마을 입구에 이르니, 빨강·파랑 청사초롱 내걸린 주막(酒幕)이 우리를 반긴다. 마당 평상에 걸터앉아 주모(酒母)를 부른다. 안주는 댓잎파전이다. 막걸리 몇 사발 들이켜고 나니 어느덧 해는 지고, 처마 끝에 가늘게 걸린 초승달만 처연하다.
막걸리 기운에 취한 것일까. 아니면 대나무 피톤치드와 음이온에 흠뻑 젖은 탓일까. 딴에는 제법 기발한 듯싶은 아이디어가 문득 떠오른다. 다음번 박람회 때는 이런 코너도 준비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그 아이디어 하나- ‘맘껏 소리 질러 봐. 장소는 죽녹원이 좋겠다. 먼저 지붕과 방음벽을 둘러친 조그만 방을 마련한다. 방 안에는 작은 대나무 한 그루 심어 놓고, 입구에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를 적어 놓는다.
이곳에 들어가면 누구나 맘껏 소리를 지를 수 있다. 연인끼리라면 ‘선영아, 사랑한다’라고 외쳐도 좋겠고, 요즘같이 교과서 국정화 논란으로 심화(心火)가 끓어오른다면, 소리 높여 욕지거리를 한다 해서 누가 뭐라 하겠는가. “또다시 유신독재 시대로 돌아가잔 말이냐, 이 18X들아!”
*그 아이디어 둘- ‘껴안고 뒹굴어 봐’. 역시 죽녹원에 한두 평 정도의 조그만 집이면 되겠다. 입구에는 ‘얼음 위에 댓잎 깔고’로 시작되는 ‘만전춘’의 시구(詩句)와 해설을 적어 놓는다. 방 안에는 어른 침대 크기의 얼음을 준비하고 그 위에 댓잎 몇 장을 깐다.
이곳에 들어오는 이들은 댓잎 깔린 얼음 위에 누워서 껴안고 뒹굴 수 있다. 사람이 너무 몰린다 싶으면 입장료는 한 5백 원 정도 받아도 되고. 다만 염려되는 것은 풍기문란(風紀紊亂)인데, 걱정할 것 없다. 차디찬 얼음 위에서 ‘지’들이 버티면 얼마나 ‘버틸라고’.
〈주필〉
왕이 감복해서 그를 사위로 삼는데, 이렇게 해서 훗날 왕이 된 이가 바로 신라 48대 경문왕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주인공이 바로 그다. 왕의 두건을 만들던 장인(匠人)이 죽기 전에야 대나무 숲속에 들어가,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외쳤다는 이야기.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 전해 온다.
* 두리번두리번, 둑방길을 걸으며 매표소를 찾는데 우선 송수권의 시(‘대숲 바람소리’)가 눈에 띈다.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 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물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한 발짝 걸음을 뗄 때마다 시 한 수씩을 감상한다. 대부분 대나무와 관련된 시들이다. 대나무를 주제로 한 세계 최초의 박람회인 ‘2015 담양 세계대나무박람회’가 이곳 관방제 부근에서 열리고 있는 것이다.
* 관방제 다리를 건너 종합 안내소에서 관람 동선을 물은 뒤, 대나무박람회를 둘러본다. 전시관에 들어서니 한쪽에 집채만 한 커다란 전구가 있다. 대나무를 전구의 필라멘트로 사용해 실험에 성공했다는 에디슨의 이야기다. 기업관·국제관에는 대나무로 만든 다양한 제품이 전시돼 있다. 대나무의 쓰임새가 이렇게도 많았던가.
감을 딸 때 썼던 간짓대, 빨랫줄을 받치는 바지랑대, 고운 머리 찰찰히 빗어 내리는 참빗…. 이처럼 예전에도 우리 일상생활 속에 긴요했던 대나무는, 때로는 악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일찍이 소설가 김훈도 그의 산문 ‘악기의 숲, 무기의 숲’에서 이를 말한 적이 있다. 죽창과 피리다.
그러고 보니 대나무를 말하면서 ‘대나무 피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인 만파식적(萬波息笛). 죽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는데, 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적의 군사는 물러가고, 병은 낫고, 물결은 평온해졌다고 한다. 역시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다.
* 친환경농업관을 천천히 걷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뱀처럼 길고 구불구불한 뱀오이, 마치 달걀 모양을 한 흰색 달걀가지…. 각종 기묘한 식물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전시장 주변 곳곳에는 대나무 아이스크림, 대나무 엿, 댓잎 식혜 등 다양한 먹을거리도 널려 있다.
* 북적거리는 인파 속을 빠져 나와 ‘지붕 없는 전시관’인 죽녹원의 돌계단을 오른다. 하늘 높이 죽죽 뻗은 대나무 숲길의 고요함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대나무는 편백나무보다 훨씬 더 많은 피톤치드를 내뿜는다고 하니, 이내 마음이 안온(安穩)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몇 걸음 채 옮기지 않아 ‘이이남 아트센터’가 보인다. ‘움직이는 그림’ 등 작가 특유의 예술세계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것도 소소한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아트센터 바로 아래에는 인간문화재인 채상장(彩箱匠) 서신정 씨의 작품이 전시된 건물이 있다. 대나무 껍질을 가늘고 얇게 만든 대오리에, 여러 가지 색깔을 들여 가로세로로 엮어 만든, 죽세공예품의 정수(精髓)가 바로 채상(彩箱:채색한 무늬를 넣어 만든 대나무 상자) 아니던가.
* 죽녹원 뒷길로 빠져 벽화마을 입구에 이르니, 빨강·파랑 청사초롱 내걸린 주막(酒幕)이 우리를 반긴다. 마당 평상에 걸터앉아 주모(酒母)를 부른다. 안주는 댓잎파전이다. 막걸리 몇 사발 들이켜고 나니 어느덧 해는 지고, 처마 끝에 가늘게 걸린 초승달만 처연하다.
막걸리 기운에 취한 것일까. 아니면 대나무 피톤치드와 음이온에 흠뻑 젖은 탓일까. 딴에는 제법 기발한 듯싶은 아이디어가 문득 떠오른다. 다음번 박람회 때는 이런 코너도 준비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그 아이디어 하나- ‘맘껏 소리 질러 봐. 장소는 죽녹원이 좋겠다. 먼저 지붕과 방음벽을 둘러친 조그만 방을 마련한다. 방 안에는 작은 대나무 한 그루 심어 놓고, 입구에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를 적어 놓는다.
이곳에 들어가면 누구나 맘껏 소리를 지를 수 있다. 연인끼리라면 ‘선영아, 사랑한다’라고 외쳐도 좋겠고, 요즘같이 교과서 국정화 논란으로 심화(心火)가 끓어오른다면, 소리 높여 욕지거리를 한다 해서 누가 뭐라 하겠는가. “또다시 유신독재 시대로 돌아가잔 말이냐, 이 18X들아!”
*그 아이디어 둘- ‘껴안고 뒹굴어 봐’. 역시 죽녹원에 한두 평 정도의 조그만 집이면 되겠다. 입구에는 ‘얼음 위에 댓잎 깔고’로 시작되는 ‘만전춘’의 시구(詩句)와 해설을 적어 놓는다. 방 안에는 어른 침대 크기의 얼음을 준비하고 그 위에 댓잎 몇 장을 깐다.
이곳에 들어오는 이들은 댓잎 깔린 얼음 위에 누워서 껴안고 뒹굴 수 있다. 사람이 너무 몰린다 싶으면 입장료는 한 5백 원 정도 받아도 되고. 다만 염려되는 것은 풍기문란(風紀紊亂)인데, 걱정할 것 없다. 차디찬 얼음 위에서 ‘지’들이 버티면 얼마나 ‘버틸라고’.
〈주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