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온다. 찜찜하지만 받는다. 어김없다. 싸게 빌려줄 테니 돈 쓰라는 내용이다. 모처럼 한가한 시간에 볼만한 프로그램을 찾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린다. 짜증이 난다. 광고 대부분이 돈 빌려가란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긴 대부업체 광고가 하루 평균 약 400회나 전파를 탄다고 하니 어찌 피해갈 수 있을까. 한국은 은행을 포함한 신용공여업체의 그물망에 갇혔다. 이들이 쳐놓은 함정에서 벗어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 대부분은 빚쟁이다. 청장년층은 학자금, 자동차, 집 또는 생활비 때문에 빚을 진다. 은퇴자도 예외일 수 없다. 쥐꼬리만 한 퇴직금과 연금으론 미래를 담보할 수 없으니 조그만 가게라도 하려면 또 빚을 져야 한다. 이런 빚이 없다고 자신할 일은 아니다.

빚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보통 사람의 일생은 부채와 함께 한다. 과장해 표현하면 산다는 것은 빚을 내고 또 그것을 갚아나가는 과정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우린 이미 부채의 덫에 걸렸다. 아무리 부정해도 진실이다.

우리 대부분은 빚을 갚기 위해 일한다. 삶이 자유로워야 하지만 부채의 덫에 걸린 이상 그것은 꿈일 뿐이다. 신용카드 대금과 대출금이 발목을 잡으니 싫어도 일을 해야 한다. 노예의 삶과 무엇이 다른가.

누가 우릴 빚쟁이 노예로 만드는가. 바로 자본이다. 자본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해 빚을 남발한다. 우선 자본은 순한 양의 사회를 원한다. 그들은 대중이 저항하지 않고 시키는 일만 묵묵히 하길 바란다. 이를 위한 최고의 방편이 우리를 빚의 올가미에 묶어두는 것이다.

또 자본은 넘쳐나는 생산물을 처리해야 한다. 어떻게든 그것을 팔아야 한다. 자본이 생산물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과잉 생산물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과잉 소비뿐이다. 물론 우리의 지갑은 이미 마른 상태이다. 생산물이 넘쳐날수록 빚도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정부까지 가세했다. 성장을 위해 소비가 필요한 상황, 다시 빚이 강권되었다. 이러니 빌리지 않는 게 외려 비정상이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싸게 빌려준다는 유혹을 참아내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은 자본이 쳐놓은 거미줄에 속절없이 걸려들기 마련이다. 일단 빌리면 벗어나는 건 힘들다. 팽창하려는 게 빚의 속성이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다. 금융위기 이후 가계부채 증가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가장 높았다. 집을 사기 위해 빌리는 것뿐만 아니라 전월세 자금 및 생계비 마련을 위해 빌리는 비중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 계속된 금리 인하로 인한 저금리 분위기 속에 가계부채는 말 그대로 폭증하고 있다. 그만큼 서민들 삶이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빚이 무한히 늘어날 수 없다는 데 있다. 부채는 담보를 근거로 만들어진다. 한데, 담보는 유한하다. 결국 빚도 무한 팽창할 수는 없다. 부채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유한한데 마냥 커지면 어찌될까. 깨지게 된다. 바로 부채위기라 말하는 빚의 폭발이다. 현대 경제는 과도한 신용을 먹이삼아 성장한다. 하지만, 신용의 무한 성장은 불가능하다. 지구의 자원 자체가 유한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저금리도 영원할 수 없다. 글로벌 금리시장은 변곡점에 이른 상태이다. 글로벌 금리는 철새 떼의 편대비행과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 우두머리 새가 방향을 틀면 다른 새들도 방향을 바꾸듯, 대장금리 격인 미국 금리가 오르면 다른 나라의 금리도 동반 상승하기 마련이다. 한데, 미국의 금리가 오르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우리 정부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러니 서둘러 ‘안심대출’이란 명목으로 부채시장을 안정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명목이야 대출 받은 사람을 위한다는 것이지만 실상은 금리 흐름의 변화를 예상한 최소한의 금융시스템 보호책이다.

세계가 부채로 열병을 앓은 게 채 10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린 그것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빚을 늘렸다.

역사는 말한다. 빚을 진 개인과 국가는 언제나 어려움에 처한다는 걸. 부디 그 대가가 혹독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서둘러 빚을 줄일 일이다.

<경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