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殉敎)냐, 배교(背敎)냐. 막부 관리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신앙을 버릴 것을 종용한다. 배교하면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린 채 죽어가는 농민 신도들을 살려주겠다고 회유한다.

신부는 감옥 속에서 “주여,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라고 중얼거린다. 괴로워하던 신부는 그만 성화(聖畵)를 맨발로 밟고 만다. 이때 동판에 새겨진 그 분이 신부에게 말한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일본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가 1966년 발표한 장편소설 ‘침묵’에 나오는 일화다. ‘침묵’은 17세기 당시 일본 기독교 박해 상황을 생동감 있게 그린 소설. 저자는 나가사키에서 거무스름한 발가락 자국이 남아 있는 널판(성화)을 본 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고교 시절 읽었던 이 소설이 문득 떠올라 다시 손에 들었다.

조선 후기의 천주교 역사는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지지 않고 자생적으로 이뤄졌다. 네 차례에 걸친 박해를 받으며 1만여 명의 신도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예전에 백두대간 종주를 하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여우목 마을 내에 세워진 십자가를 본 적이 있다. 대미산 아래 자리한 이 오지마을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 피신 온 신도들이 모여 신앙생활을 하던 교우촌이다. 인근 충북 괴산면 연풍 성지는 이들이 잡혀가 순교한 곳. 이곳에는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천주교 신자들을 죽였던 직경 1m 크기의 ‘형구돌’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보는 이들을 전율케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6일 100만 명의 신도들이 운집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미사에서 장성 출신 김조이·이봉금 모녀를 비롯한 순교자 124위에 대해 시복(諡福) 선언을 했다. 교황은 ‘세월호’ 유가족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손을 잡아 주기도 했다.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는 장애 아동들의 공연을 선 채로 관람했다. 정말 ‘소탈한’ 행보였다.

그렇게 낮은 데로 임한 교황이 오늘 한국을 떠난다. 이번 교황의 방한은 정치적 이념논쟁과 경제적 불평등으로 고통받는 우리 사회에의 화해와 평등의 가치를 새삼 일깨워 주었다.

/송기동사회2부장 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