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본의 아사히신문 인터넷판을 들여다보다 눈에 들어오는 기사를 발견하였다. 간 나오토(菅直入) 전 일본 총리가 10월 2일부터 시코쿠(四國) 지방의 ‘헨로(遍路)’를 다시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그는 지난 5월 재일한국인 정치후원자로부터 정치헌금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고발당했다가, 10월 3일 검찰로부터 불기소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즉 그의 시코쿠 지방 ‘헨로’와 불기소처분 시점이 일치한다.

‘헨로’란 일본의 시코쿠 지방에 위치한 88군데 특정한 절을 걸어서 순례하는 것을 말한다. 이 ‘헨로’는 일본에서 근대 이전부터 시작된 전통행사로, 최근에도 병에 걸린 사람들이 병이 낫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또는 일상을 떠나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순례에 나서곤 한다. 삿갓에 위아래로 흰색 옷, 그리고 손에 지팡이를 드는 독특한 순례 복장으로도 유명하다.

각 절마다 1번부터 88번까지 순번이 정해져 있어 차례대로 도는 것이 관례이다. 그 중에서 13번 순례코스에 들어가는 다이니치지(大日寺)라는 절은 2008년에 전통무용을 전공한 한국 여성 김명선씨가 주지로 취임하여 한국과 일본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의 ‘헨로’는 2004년 7월에 처음 시작되었다. 그 해 5월에 연금 미가입 문제로 민주당 대표를 사임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그가 ‘헨로’를 시작한 이유는 ‘반성’과 ‘자기성찰’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자기성찰을 위한 순례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2008년 53번에 해당하는 절까지 이어졌다가 이번에 다시 시작되었다. 정치인의 ‘보여주기’ 위한 ‘반성’이라고는 하지만, 7년 동안 계속된 그의 ‘헨로’에서 조금은 진정성이 느껴진다. 일본사회의 여론도 그다지 나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나는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의 ‘헨로’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정치인의 삼보일배를 떠올렸다. 대표적인 경우가 2004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후에, 일부 언론에서 ‘추다르크’로 추켜세운 한 여성 정치인의 삼보일배이다. 그는 여성의 몸으로, 지지자들의 용서를 구하고 ‘참회’한다는 의미에서 광주 시내에서 망월동 5·18국립묘지까지 삼보일배를 시도하였다.

삼배일보와 함께, 한국 정치인의 자기성찰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외유이다. 한국에서 정치인이 정치적으로 좌절하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에 외국으로 유학이나 연수를 떠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정동영 현 민주당 최고위원은 미국 듀크대로 떠났다가 정계에 복귀하였다. 18대 총선에서 자신의 오랜 텃밭에서 낙선한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도 미국 워싱턴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그는 재기에 성공하였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무상급식 주민투표 문제로 시장직을 사퇴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조만간 미국 스탠퍼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고 한다. 이제까지 정치적으로 좌절하거나 위기에 처한 많은 정치인이 외유를 떠난 처신에 비추어보면,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정치인들의 경우처럼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그에게 정치적으로 재기할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겠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혹시라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정치적인 야망을 갖고 재기를 꿈꾸고 있다면, 그의 미국 유학이 부디 ‘반성’과 ‘자기성찰’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국민은 정치인들의 외유가 본인의 처절한 ‘반성’과 ‘자기성찰’을 위해서 필요한 시간이었는지, 아니면 눈가림을 위한 ‘도피’와 ‘잠수’였는지 정도는 금방 판단한다. 그 같은 국민의 판단은 이후 본인의 정치적 행보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도피’와 ‘잠수’를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다면, 굳이 외화를 낭비하며 외유를 떠날 필요도 없다.

일본 시코쿠 지방의 ‘헨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도 몇 년 전부터 ‘한국33관음성지’라는 순례 코스가 만들어졌다. 일본의 ‘헨로’에 비해 ‘한국33관음성지’ 순례는 시간도 절약된다. 이 가을, 자기 성찰이 필요한 정치인은 관음성지라도 돌며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떠할지.

〈김용의 전남대 일어일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