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율’과 ‘동시성’
2008년 02월 17일(일) 18:59 가가
‘일이 잘 풀리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다. 뚜렷하게 잘못 살아온 것도 없는데, 어쩌다 돌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듯 뜻하지 않은 일을 당하면 억울한 생각이 들게 된다. 때로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가면, 전생을 들먹거리기도 한다. 어쨌든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고 보는 것은 ‘인과율’의 기본 원칙이다.
‘동시성’이라는 것은 조금 더 추상적이다. 어느 낯선 길을 걷다가도 언제가 한번쯤은 와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간혹 있다. 일종의 ‘동시성’이다. ‘인과율’과 ‘동시성’을 더하게 되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것은 운명처럼 이미 예정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긴 설 연휴를 앞두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가 흩어져 있다. 집사람은 캔자스주의 로렌스라는 곳에 있고 큰 애는 시카고에, 작은 애는 아이오와의 에임즈라는 곳에 살고 있다. 물론 필자는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좋은 말로 글로벌 가족이라 할 수 있지만, 흔히 이야기하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기러기’ 신세다. 필자도 아이들을 본 지 1년이 다 돼 가는 시점이라, 이제 한번쯤은 다녀와야 할 때가 됐다 싶었다.
한창 젊을 때야 20시간이나 걸리는 여정이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가족을 찾아 나서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미국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는 말도 실감할 겸 도착하면 아이오아, 일리노이, 그리고 미시건 주를 다녀올 작정이었다. 커다란 쇳덩어리가 활주로를 내달리더니 창공을 가로지른 후 저녁과 아침이 반복되더니 시카고에 도착했다.
22여년 전 미국 유학을 처음 올 때 도착한 곳이 시카고였다. 파란 눈의 스튜디어스가 트랩 아래에서 기다리는 동안 1월의 매서운 시카고 날씨를 맞으며 처음으로 미국의 냄새를 맡았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일종의 ‘동시성’이다. 이민 가방 다섯 개를 집사람과 끙끙거리며 옮기고 나서는 한 일주일 아파 누워 있어야 했다. 긴장이 풀린 탓도 있지만 앞일을 생각하니 막막하기도 했을 것이다.
슈퍼에서 물건을 담아 주는 종이 팩에 신문을 넣어서 이리저리 테이프로 붙이니 훌륭한 카펫이 되었다. 500달러짜리 자동차를 사는 바람에 추운 겨울날 시동을 걸 때마다 애를 먹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 차를 판 아프리카 놈을 만나면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3년 전 8년간의 미국 공무원 생활을 접고 다시 한국으로 혼자 나올 때 내 인생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전생에 한국에 왔던 인연이 있는 미국인인가? 아니면,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서 살았던 사람이었나? 혼자서 자신과 자신 사이의 ‘인과율’에 대해 생각을 한 것이다. 여기에다 집사람과 아이들까지 이제 미국 땅에서 지내고 있으니 이들은 과연 ‘나와의 인연 때문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인연 때문인가 하는 물음에까지 미치게 된다.
시간을 다시 접어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큰 애를 임신한 집사람과 몸 푸는 것을 돌봐주러 오신 모친을 모시고 10시간을 넘는 도로여행 끝에 지긋한 캔자스의 서쪽 주경계선에서 잠시 내려 다시는 캔자스에 오지 않겠노라고 ‘가운데 손가락’을 내보이며 사진까지 찍었다.
하지만, 결국 그곳이 나에게 제 2의 고향이 되고 말았다. 미국 생활 22년 가운데 17년을 캔자스에서 지냈으니 말이다. 마치 ‘인과율’과 ‘동시성’이 한꺼번에 만난 결과처럼 느껴진다.
1년 만에 만난 딸과 아들은 어른이 다 되어 있었다. 딸은 벌써 남자 친구를 소개한다면서 아빠의 눈치를 살핀다. 대학에서 만난 어린 애들이 무슨 장난하느냐고 생각하다가는 나 자신이 대학 1학년 때 만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집사람을 생각하니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기도 하다.
미국 백인 아이인 남자 친구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여간 조심스러운 모습이 아니다. 아들 녀석도 미국 백인 여자 친구를 섭외 중에 있는 모양이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백의민족이자 우수한 단일 민족국가의 체통을 유지하려면 국제결혼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 자신이 갖는 정체성의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지 않다. 기억나지는 않겠지만, 과거에 나 자신은 미국에 살았을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글로벌’ 가족을 갖게 된 것이라는 ‘인과율과 동시성’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곽수종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경제학 박사
‘동시성’이라는 것은 조금 더 추상적이다. 어느 낯선 길을 걷다가도 언제가 한번쯤은 와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간혹 있다. 일종의 ‘동시성’이다. ‘인과율’과 ‘동시성’을 더하게 되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것은 운명처럼 이미 예정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긴 설 연휴를 앞두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가 흩어져 있다. 집사람은 캔자스주의 로렌스라는 곳에 있고 큰 애는 시카고에, 작은 애는 아이오와의 에임즈라는 곳에 살고 있다. 물론 필자는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좋은 말로 글로벌 가족이라 할 수 있지만, 흔히 이야기하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기러기’ 신세다. 필자도 아이들을 본 지 1년이 다 돼 가는 시점이라, 이제 한번쯤은 다녀와야 할 때가 됐다 싶었다.
한창 젊을 때야 20시간이나 걸리는 여정이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가족을 찾아 나서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미국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는 말도 실감할 겸 도착하면 아이오아, 일리노이, 그리고 미시건 주를 다녀올 작정이었다. 커다란 쇳덩어리가 활주로를 내달리더니 창공을 가로지른 후 저녁과 아침이 반복되더니 시카고에 도착했다.
22여년 전 미국 유학을 처음 올 때 도착한 곳이 시카고였다. 파란 눈의 스튜디어스가 트랩 아래에서 기다리는 동안 1월의 매서운 시카고 날씨를 맞으며 처음으로 미국의 냄새를 맡았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일종의 ‘동시성’이다. 이민 가방 다섯 개를 집사람과 끙끙거리며 옮기고 나서는 한 일주일 아파 누워 있어야 했다. 긴장이 풀린 탓도 있지만 앞일을 생각하니 막막하기도 했을 것이다.
슈퍼에서 물건을 담아 주는 종이 팩에 신문을 넣어서 이리저리 테이프로 붙이니 훌륭한 카펫이 되었다. 500달러짜리 자동차를 사는 바람에 추운 겨울날 시동을 걸 때마다 애를 먹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 차를 판 아프리카 놈을 만나면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3년 전 8년간의 미국 공무원 생활을 접고 다시 한국으로 혼자 나올 때 내 인생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전생에 한국에 왔던 인연이 있는 미국인인가? 아니면,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서 살았던 사람이었나? 혼자서 자신과 자신 사이의 ‘인과율’에 대해 생각을 한 것이다. 여기에다 집사람과 아이들까지 이제 미국 땅에서 지내고 있으니 이들은 과연 ‘나와의 인연 때문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인연 때문인가 하는 물음에까지 미치게 된다.
시간을 다시 접어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큰 애를 임신한 집사람과 몸 푸는 것을 돌봐주러 오신 모친을 모시고 10시간을 넘는 도로여행 끝에 지긋한 캔자스의 서쪽 주경계선에서 잠시 내려 다시는 캔자스에 오지 않겠노라고 ‘가운데 손가락’을 내보이며 사진까지 찍었다.
하지만, 결국 그곳이 나에게 제 2의 고향이 되고 말았다. 미국 생활 22년 가운데 17년을 캔자스에서 지냈으니 말이다. 마치 ‘인과율’과 ‘동시성’이 한꺼번에 만난 결과처럼 느껴진다.
1년 만에 만난 딸과 아들은 어른이 다 되어 있었다. 딸은 벌써 남자 친구를 소개한다면서 아빠의 눈치를 살핀다. 대학에서 만난 어린 애들이 무슨 장난하느냐고 생각하다가는 나 자신이 대학 1학년 때 만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집사람을 생각하니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기도 하다.
미국 백인 아이인 남자 친구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여간 조심스러운 모습이 아니다. 아들 녀석도 미국 백인 여자 친구를 섭외 중에 있는 모양이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백의민족이자 우수한 단일 민족국가의 체통을 유지하려면 국제결혼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 자신이 갖는 정체성의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지 않다. 기억나지는 않겠지만, 과거에 나 자신은 미국에 살았을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글로벌’ 가족을 갖게 된 것이라는 ‘인과율과 동시성’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곽수종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경제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