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한 달 전, 차기 대통령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안창호 씨”라고 답했다가 또 다른 후보 진영으로부터 호되게 비판을 당한 적이 있다. 전 국민이 추앙하는 민족 지도자를 ‘선생’이 아닌 ‘씨’로 호칭한 대통령 후보의 역사의식 부재를 다시 문제 삼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때 나온 말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천박하고 뒤틀린 대통령 후보의 개조론”이었던 바, 이는 민족 독립의 방법론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었던 도산의 ‘민족개조론’을 원용한 것임은 물론이다.
이제는 지난 시간의 창고 안에 고이 간직해도 좋을 ‘민족개조론’을 오늘 또 다시 들고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최근에 이루어진 한 여론조사의 결과 때문이다. 얼마 전, ‘사람인’이라는 이름의 한 취업 사이트에서는 직장인 1천62명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미래가 걱정되십니까?’라는 설문을 실시한 결과, 무려 88.1%가 ‘그렇다’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직장인 10명 중 9명으로 하여금 국가의 내일을 낙관할 수 없도록 만든 주된 요인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첫 번째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회 지도층의 부정부패’(39.1%), 두 번째가 ‘이기주의의 팽배’(17.5.%)였다. 놀라온 것은 도산의 ‘민족개조론’에서 제기된 국권 상실의 주요인이 이번 여론조사의 결과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절망이라는 이름의, 결코 치유가 쉽지 않은 병에 걸리도록 몰아넣었던 첫 번째 요인이 고위 공무원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부패요, 비리라고 하는 사실은, 이것이 오늘 내일의 일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신문의 지면을 도배하다시피하고 있는 뉴스들, 누구보다도 원칙과 청렴을 중요시했어야 할 고위직 인사들이 뇌물수수와 직권남용 등 권력형 비리의 온상이었음을 거듭 확인해야 하는 현재의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와 좌절에 빠지도록 만든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미래를 낙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두 번째 요인, 곧 균형적인 사회 발전에 커다란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이기주의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 때문에 권력형 비리 못지 않은 심각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나’와 ‘우리 가족’만을 앞세웠고, 혈연과 지연, 학연 등에 얽매이는 집단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만, 그리고 우리만 잘 살면 된다는 집단이기주의는 국가의 균형발전이나 사회 전체의 이익과 상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뒷마당은 안 돼” 식의 님비 현상의 주역이 되어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행태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우리의 의식을 끈질기게 사로잡고 있는 고질적인 지역감정 역시도 집단 이기주의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당면해 있는 가장 큰 과제, 곧 국가의 지도자를 뽑는 중차대한 일에 있어서도 대통령 후보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론보다는 어느 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는가가 더 큰 강점 혹은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의식이 우리를 지배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밝을 수 없다.
그렇다고 희망은 정녕 없는 것일까? 해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도산의 ‘민족개조론’을 꼼꼼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는 대로, 도산의 ‘민족개조론’은 우리 민족의 저력에 대한 철저한 신뢰의 바탕에서 나온 자기비판이다. 그는 우리 민족성을 결코 고착화된 성격으로 보지 않고, 우리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사실 해결책은 너무나 간단하다. 비리 공무원이 설 땅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철저한 윤리의식, 집단이기주의를 넘어서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제대로 키우기만 한다면, 기적적인 경제성장에 걸맞은 정치와 의식의 선진화를 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민족개조론’ 운운이 시대착오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잠재적 능력, 변화와 개혁의 주창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에 희망을 걸어도 좋으리라 본다.
강희숙〈조선대 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