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죽이고 있습니다. 광주를 지킵시다!”
계엄군이 ‘화려한 휴가’를 보내는 새벽시간, 신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아무도 잠들지 못한 골목골목을 돌며 피끓는 목소리로 광주 지키기에 나설 것을 호소한다.
계엄군이 도청을 점령할 무렵 그녀의 호소는 바뀌었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그녀가 지키려고 한 것, 잊지말아달라고 호소한 상대는 공간적 의미의 광주, 시민군 개개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광주‘와 ‘시민군‘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상징하는 시댓말인 것이다. ‘광주’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마다 조타수 역할을 해왔다.
또 다시 한국 민주주의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종전과 달리 정치적 기본권의 위기가 아니라 일자리, 주거, 교육, 복지 등 민생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정보통신 등 일부 첨단산업이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었고, 수출이 3천억불을 넘어섰다. 주가지수도 2천 포인트를 넘나들고 있다. 하지만, 중산층이 붕괴되고 서민들의 삶은 더 어려워지고 있다. 국가경제가 수출기업과 대기업을 중심으로 성장한 결과 전체 고용의 88%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의 경쟁력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 결과 일자리 환경 역시 나빠져서 정규직 급여의 60% 이하를 받는 비정규직이 55%를 넘어섰다. 주택보급률이 4년 전에 이미 100%를 넘어섰음에도 자기집을 보유한 국민은 56% 수준이다. 사교육비로 지출되는 소득(33조 5천억 원)이 정부 교육예산(2007년 31조)보다 더 많다. 돈이 없으면 능력이 있어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되어 ‘기회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우리의 현실은 광주정신과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1인 1표의 원리’가 작동하는 시장에서는 가진 사람이 유리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전적으로 시장의 원리에만 따르게 되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강화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시장의 실패’는 ‘1인 1표의 원리’가 적용되는 민주주의에 의해 교정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사수한 광주정신, 광주정신을 올바로 계승한 정치가 절실한 때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밖으로는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흐름이 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 축소를 끊임없이 압박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최근의 졸속적인 한미FTA협정 체결과정에서 확인된 것처럼,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영향을 축소하려는 노력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염려스러운 것은 차기 정부를 책임지겠다는 대선 후보들 역시 신자유주의적 정책노선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나라당 후보들이야 그렇다치지만, 서민과 중산층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옹호하는 개혁적 정치노선을 표방하는 반한나라당 진영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나라당에서 장관, 도지사, 3선 국회의원을 지내다 당내 경선과정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자 탈당하여 반한나라당 진영으로 옮겨온 손학규 전지사의 정책노선이 한나라당에 가까운 반(半)한나라당적인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반(反)한나라당 정책노선을 주장해온 이른바 범여권 정치인들 중 일부가 납득할 만한 해명도 없이 손 전지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책임정치의 원리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태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광주 지역 일부 정치인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나아가 광주 지역의 일부 시민사회단체 출신 인사들 역시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
혹자는 손 전지사가 70년대 운동을 했다는 점을 들어 ‘동지의 귀환’이라는 헌사까지 바쳤다고 한다. 한나라당 내 운동권의 대부라고 한다면 손 전지사보다는 이재오 최고위원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최고위원 역시 ‘동지’로 인정받아야 하는가. 어떤 이는 미래가 더 중요하므로 과거의 흠을 들추는 것은 분열적인 행동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이명박, 박근혜 후보의 과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27년 전 신애가 지키려고 했던 ‘광주’, 잊지말아달라고 한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광주정치가 광주정신을 회복하길 바란다.
이상갑 <변호사>